5월 광주, 국제 인권도시로 발돋움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0.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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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20주년 맞아 ‘항쟁 정신 세계화’ 박차… 국제 평화운동 메카로 거듭나기
흔히 5·18 하면 1980년 5월의 그 처절했던 광주 학살 현장을 떠올린다. 그러나 눈을 돌려 보면 5월은 광주만의 것은 아니다. 가까운 아시아의 태국 국민은 군사 독재에 맞선 시위대에 군대가 처음 발포한 날(1992년 5월18일)로 5·18을 기억한다. 특히 당시 희생자의 가족 모임인 태국 ‘5월 영웅위원회’ 회원은 오는 5월17∼19일 광주를 방문해 5·18 민중항쟁유족회 등 5월 광주의 희생자 가족들과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눌 예정이다. 이들은 또 동 티모르와 캄보디아 등 9개국 민주화운동 희생자 가족과 ‘아시아 실종자 추모비’ 건립 행사에 참여한 뒤 아시아 지역의 인권 유린에 공동 대응할 ‘아시아 민주희생자 가족연대회의’ 구성에 함께 나선다.

‘1인 1달러 모금운동’ 추진

이와 관련해 정수만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는 “5·18 광주는 이제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상징으로서 기여해야 한다. 광주는 가까운 동아시아 인권 상황에 눈을 돌려 국제 인권운동의 메카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라고 말했다(41쪽 상자 기사 참조). 5·18이 광주를 넘어 아시아 인권운동의 모범 사례로 ‘세계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20주년을 맞은 올해 5·18의 화두는, 광주를 넘어서는 국제적인 인권·평화 운동으로 위상을 정립하는 일이다. 5·18 기념재단이 아시아 인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한 해에 50만명 이상이 다녀가는 5·18 묘지 참배객을 대상으로 ‘1인 1달러 모금운동’을 추진하려는 계획 역시 5·18 정신을 세계화하는 데 의미를 둔 작업이다. 광주 북구청은 아예 내년부터 5·18 광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전남대 정문과 북구청을 잇는 지역을 ‘인권 거리’로 조성해 국제적인 인권 지도자들의 흉상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기초 자치단체부터 나서서 광주를 국제 인권운동의 상징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전남대 5·18 연구소 역시 5월15일부터 인도네시아군의 폭압성을 전세계에 고발해 동 티모르의 독립을 이끌어낸 공로로 199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벨로 주교를 초청해 국제 인권 관련 학술대회를 열 계획이다.

5·18 민중항쟁 20주년 기념행사위원회(상임행사위원장 김동원)가 주도하는 올해의 기념 행사들도 인권 행사에 집중되어 있다. 올해 20주년 학술 심포지엄은 국내가 아닌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UCLA에서 열렸고, 내년에는 유럽에서 인권·평화 운동이 활발한 독일에서 열린다. 또 5·18 묘지에서는 행사 기간에 5·18 광주 학살 사진전이 아닌 아시아 인권 상황을 다룬 국제 전시회가 개최되고, 올해 처음으로 제정된 천만원 상금의 ‘광주인권상’도 수여된다. 5·18 기념재단은 또 5·18 광주의 진실 규명 투쟁을 지원해온 외국의 사회·종교 단체 인사들을 초청해 광주가 앞으로 동아시아 인권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힐 예정이다.

이러한 세계화와 전국화 흐름에 따라 올해는 전국 10개 도시에서 기념식이 동시에 치러지고, 18일 광주 5·18 묘지에서 열릴 기념식에는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한다. 또 인권·민주화 운동의 맥락에서 제주 4·3항쟁과 부마항쟁에 대한 진상 규명 운동에 함께 참여하고 공동 대응하기 위한 학술 행사도 준비되어 있다. 전국 각지에서 참가한 90여 참가자가 5월 정신 계승과 통일을 다짐하며 국토 종단 대행진을 벌이고 있는 것 역시 5·18 정신 계승이 광주를 넘어서 국민 모두의 몫이 되어야 한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5·18이 새 천년을 맞아 인권운동과 평화운동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지금까지 5·18에 대한 관심이 시간적으로는 5월을, 공간적으로는 광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아울러 1997년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한 뒤부터 과거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투쟁 위주의 5·18 운동이 정신 계승과 기념 사업으로 옮아갔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국제 인권 도시 만들기, 이제 시작이다”

사실 5·18을 인권운동으로 승화시키고 세계화하려는 움직임은 진작부터 있었다. 광주 지역 시민단체인 광주시민연대는 1994년부터 ‘해외에서 바라본 5·18 광주민중항쟁’과 ‘반 인륜 행위와 처벌’ 등을 주제로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고, 동아시아의 인권 단체 실무자들을 초청하는 국제 청년 캠프를 주최해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당위성을 국내외에 주창해 왔다. 이러한 노력으로 광주시민연대가 발간한 (한국판 제목은 ‘5·18 특파원 리포트’)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관여한 고위 인사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1998년에는 아시아 지역 NGO 정상회담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시아 인권헌장 선언대회까지 개최해 광주를 국제 인권 도시로 발돋움시킬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지난해에는 ‘어떻게 광주를 21세기의 국제적 인권 도시로 만들 것인가’라는 토론회를 통해 광주를 아시아 인권운동의 메카이자 등대로 발전시킬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5·18 기념재단과 5월 관련 단체들이 추진하고 있는 5·18 운동의 세계화와 인권운동으로 위상을 정립하는 일은 광주시민연대의 이런 노력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5·18 세력의 아시아 인권운동 연대를 앞서서 주창해온 광주시민연대모임 회원 이재의씨(44·현재 광주시 투자자문관)는 “독재 정권의 학살에 대한 저항과 열흘 간의 항쟁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과 그 뒤의 민주 정부 출범에 이르기까지 광주는 인권과 저항의 모범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교과서이다. 광주를 국제 인권운동의 중심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광주의 5월 단체뿐만 아니라 국내 민주화운동 세력들의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5·18의 원흉’이라는 지탄을 받던 미국도 광주를 이제 한국 현대 정치사의 핵심적 주제 가운데 하나로 연구할 정도가 되었다. 현재 광주 항쟁과 관련한 최대의 베스트 셀러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미국에서 번역되어 UCLA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고, 5월 말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서문이 실린 <5·18 특파원 리포트>의 개정증보판인 이 미국의 출판사에서 간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 국제적 인권 도시로서 광주의 모습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인권 도시라는 광주권의 대학에 인권 관련 학과 하나 개설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고품격 상품화’를 통해 인권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마인드 역시 부족하다는 비판이다. 광주정신(Kwangjuism)의 세계화와 인권·평화 운동의 메카라는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20년 만에 광주는 새로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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