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전남도청을 ‘날치기’ 했나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1999.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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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의회, 여론 수렴 없이 도청 소재지 무안으로 변경
의원들 간의 거친 몸싸움, 물리력을 동원한 본회의장 진입, 의장석을 점거한 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질의 응답도 없이 단 1분 만에 의장이 선언하는 가결 선포. 김대중 정권의 텃밭인 광주에서 최근 이러한 꼴불견이 연출되어, 정치 개혁을 희망하는 호남 지역민을 크게 실망시켰다.

전라남도 의회는 지난 6월30일 지방의회 초유의 ‘날치기 처리’ 를 통해, 전남도청 소재지를 광주시 광산동에서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일대로 옮기는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지난 6년 동안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광주·전남 지역을 뜨겁게 달군 도청 이전 논란은 일단락되었고, 전남도청은 개도(開道)한 지 1백3년 만에 광주시를 벗어나게 되었다(41쪽 상자 기사 참조). 전남도의회가 빚은 이번 파행은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회의에 상당한 부담을 줄 것으로 보인다.

도청 소재지 변경 조례안 표결을 앞둔 전남도의회에는 하루 전부터 전운이 감돌았다. 전체 도의원 55명 가운데 이른바 ‘도청 이전 찬성파’ 의원 30여 명은 광주 시내 한 호텔에 집결해 숙식을 함께 하며 표 단속에 나섰다. 목포 출신인 이완식 전남도의회 의장은 언론을 통해 “민주주의란 종다수가 원칙인데, 소수가 힘으로 저지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다”라며 물리력을 통한 조례안 통과 강행 의사를 내비쳤다.

“무안군 이전은 목포의 실세 정치인 뜻”

이에 맞서 주민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도의원들이 표결 처리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온 ‘전남도의회 도청 이전 반대 및 시·도 통합 추진위원회’ 소속 도의원 13명 중 11명은 삭발한 뒤 29일 오후 3시부터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조례안 통과 저지를 천명했다. 최병순 전남도의회 부의장은 “목포 지역의 힘 있는 실세 정치인이 도청이 목포로 가야 한다고 하자,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반대 의견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다. 도의원들 역시 ‘거수기’ 역할을 할 게 뻔한데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다”라며 결사 반대를 표명했다. ‘결전의 날’인 6월30일은 5선 경력의 노련한 정치인이자 재선 단체장인 허경만 전남도지사의 ‘도청 이전 밀어붙이기’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나는 날이었다. 김홍일·한화갑 의원 등 목포에 지역구를 둔 국민회의 핵심들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경찰 4개 중대가 도의회 주변을 둘러쌌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119 응급 구조대가 배치되었다.

도청 이전에 찬성하는 목포·무안 지역 주민들은 이 날 도의회 본회의 방청권을 독식했고, 이에 항의해 여수와 나주 등 전남 동부·중부권 주민 수백 명도 도의회 앞으로 몰려들었다. 도청 이전에 찬성하는 노상익씨(54·목포시의원)는 “무안으로 도청을 이전키로 한 것은 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약속한 5·18 기념사업이기도 하다. 전남 지역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려면 도청 이전 조례안이 통과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고효주 여수 YMCA 이사장은 “지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대통령 고향으로 도청을 옮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처리를 강행한다면 전남도민이 사분오열되어 민심이 갈라질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조례안 강행 처리를 기정사실화한 ‘이전 찬성파’ 의원들은 여론을 의식해 변칙 처리를 오후로 미루는 지연 작전을 펼쳤다. 이들은 또 본회의장을 점거한 의원들과 ‘마지막 타협’을 모색하는 모양새도 갖추었다. 그동안 허경만 도지사는 조례안이 통과되는 즉시 발표할 ‘도민에게 드리는 담화문’을 손질했다. 이와 관련해 전남도의 한 관계자는 “내년분 예산으로 국고 지원을 요청한 도청 이전 사업비 5백억원 배정이 조례안 통과 여부에 달려 있다. 더 늦출 수 없다”라며 집행부와 의회 사이에 강행 처리가 이미 합의되어 있음을 내비쳤다.

개회부터 통과까지 3분도 안 걸려

마침내 오후 5시를 넘어서 찬성파 의원들은 잠긴 본회의장 손잡이를 스패너로 부순 뒤 진입했고, 반대파 의원들은 자신들이 배설한 오물까지 뿌리며 격렬히 저항했지만 세싸움에서 밀리고 말았다. 오후 7시45분, 끝까지 저항하는 의원들을 본회의장 밖으로 몰아낸 찬성파 의원 30여명은, 이완식 의장의 사회로 ‘전남도청 소재지 변경 조례안’을 상정한 뒤 33명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조례안 통과는 개회부터 폐회까지 겨우 3분을 넘지 않았다. 도청 이전 반대 의사를 밝힌 최형식 의원(도의회 운영위원장)은 “이의 제기도 무시하고 의사 진행 발언이나 찬반 토론, 질의 응답도 없이 처리한 본회의 조례안 통과는 날치기며 무효다. 소송을 제기하겠다”라며 강력히 항의했다.

이 날 ‘작전’과 관련해 광주 MBC와 목포 MBC는 중계차를 동원해 지방 선량들의 몸싸움을 생중계했고, 취재 기자들은 해외 토픽에 나올 일이라며 어이없어 했다. ‘광주·전남 정치개혁 포럼’ 김용억 공동대표는 “시·도민에게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도청 이전 문제를 정당한 의견 수렴을 무시하고 물리력으로 강행 처리한 것은, 김대중 정부의 모태나 다름 없는 지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라며 이날 도의회 파행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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