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철 여승무원들이 웃음 잃은 까닭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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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에 화나고 감전 사고에 겁먹고
‘대한민국을 확 바꾸겠다’는 고속철 개통과 함께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여성 승무원이다. 여승무원들은 빼어난 미모와 비행기 스튜어디스 수준의 높은 서비스를 선보이며 단번에 ‘고속철의 꽃’으로 떠올랐다.

여승무원들은 13.3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인재들이다. 지원자 중에 대학원 졸업 이상의 학력 소지자와 해외 유학파도 상당수 있었다. 공무원 대우에다 정년이 보장되고 출퇴근 시간도 정해져 있다는 이유로 스튜어디스 출신과 현역 새마을호 열차 승무원 지원자가 밀려들었다.

고속철이 개통된 지 채 두 달이 안 된 지금, 고속철 여승무원에게서 친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튜어디스와 서비스 경쟁을 해서 이기겠다는 집념도, 유라시아 고속철을 잇는다는 자부심도 보이지 않았다. 여승무원들은 철도청과 홍익회가 승무원들과 맺은 불합리하고 부정확한 계약 문제를 이유로 들었다.

일부 여승무원 “술자리에서 신체 접촉”

여승무원은 철도청 유관 기관인 홍익회 소속으로 현재 3백45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철도청 기능직 10등급 1호봉 대우를 받는다. 새마을호 여승무원 초임인 연봉 2천2백만원 가량을 받게 된다. 하지만 여승무원들은 계약한 급여의 60~70%만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 여승무원은 “월급 명세서를 받고 보니 처음 계약할 때와 전혀 달랐다. 제도가 바뀌었다고 하는데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간부들이 월급 문제를 거론하면 내년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다른 여승무원은 “교육비 100만원 가량은 아예 못 받았고, 3월 시범 운행 때 받았어야 할 급여는 5월에야 받았다. 4월 말 철도청의 홍익회 감사가 있은 이후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홍익회 관계자는 “교육비·식대·견습비 등 급여는 모두 규정대로 지급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몇몇 철도청 관계자는 “철도청이 책정한 승무원 급여를 홍익회가 지급하면서 비자금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확인한 결과, 최근 철도청·홍익회 비자금과 관련한 보고서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올라갔고, 사정기관은 내사에 착수한 상태다.

여승무원의 미소를 사라지게 한 더 큰 이유는 여승무원의 신분이 극히 불안정한 비정규직이라는 데 있다. 여승무원들의 계약 기간은 1년. 올해는 홍익회와 3월부터 12월31일까지만 계약되어 있다. 홍익회는 ‘철도청과 홍익회가 협약을 맺은 불가피한 근로 계약 조건으로 철도청 민영화에 대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가 여승무원 성추행으로까지 몰아갔다. 개통된 지 두 달도 안 되어 고속철이 ‘사고’를 내고 있는 것이다.
고속철 승무원들은 대개 당일 근무를 마친다. 하지만 부산·동대구·목포·광주·서울 등지에서 일이 끝나는 직원들은 그곳 숙소에서 일박하게 된다. 승무원들은 이를 ‘박차’라고 하는데, 이때 문제가 터졌다. 여승무원을 관리하는 한 간부가 박차를 하는 여승무원 여러 명에게 노골적인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낮에 널 보고 잠이 안 온다’ ‘애인하자’ 따위 내용이었다. 또한 이 간부는 여승무원들에게 술자리를 함께하기를 강요했다. 내년 계약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은근한 협박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상사의 명령에 마지못해 술을 마시러 나갔던 여승무원 몇 명은 술자리에서 신체 접촉 등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했다.

여승무원 5~6명에게서 성추행 당사자로 지목된 이 간부는 “밤 늦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은 업무상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여승무원들과 술을 마신 적은 있으나 성적으로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동을 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한 여승무원은 “계약을 들먹이면서 술자리에 나오라고 하는데 신분이 불안한 우리로서는 안 나갈 수가 없다. 1년 계약이라는 불안한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관리자들의 성 추문 문제는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철도청과 홍익회에서는 성추행 문제는 처음 듣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승무원들은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 간부의 성추행에 대한 글을 올렸으나 곧 삭제되었다며 철도청과 홍익회가 조직적으로 은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요하던 여승무원들을 분개하게 만든 것은 여승무원 감전 사고였다. 지난 4월 24일오후 4시 용산역에서 손님을 맞으려던 여승무원이 KTX 차체에 감전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감전으로 인해 여승무원의 오른쪽 발꿈치에서 피가 터질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고 동료 승무원들은 말했다. 여승무원은 바로 고향 부산으로 옮겨져 입원했고, 1주일 만에 출근했다.

관리자는 입단속에만 급급

홍익회측은 감전 사고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출혈은 2차적으로 발생한 타박상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홍익회 관계자는 “출입문 손잡이 부분에서 감전되어 승무원이 놀라서 주저앉다가 발꿈치 부분이 까진 2차 상처다. 충분히 휴식하라는 배려로 1주일 휴가를 줬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여승무원은 주저앉다가 발꿈치가 까진 상처를 1주일씩이나 산재로 처리해 주는 곳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감전 사고 이후 회사측이 보인 행태는 더욱 문제가 있었다. 사고 이후 홍익회 간부는 사고를 당한 여승무원에게 전화를 걸어 소문이 나면 불리할 수 있다며 입 단속을 당부했다고 한다. 한 여승무원은 “홍익회의 한 고위 간부는 ‘감전이 일어날 수 있으니 교육할 때 통로 환풍기나 몇몇 부분은 절대 만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사고 여승무원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철도의 안전 사고를 관리하는 철도청 안전관리실과 전기본부는 감전 사실조차 보고받지 못했다고 한다. 고속철을 만들고 관리하는 고속철도시설공단측은 ‘모르는 일이다. 감전 사고를 왜 우리에게 물어보느냐’며 오히려 역정을 내기도 했다.

사고 이후 안전을 위해 취해진 조처는 아무 것도 없었다. 김세호 철도청장이 위로금 5만원을 주었을 뿐이다. 한 여승무원은 “크고 작은 감전 사고는 자주 발생했다. 2만5천 볼트 전기 속에서 늘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입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여승무원도 “고속철 통로와 승무원실, 특히 히터 주위는 문제가 많다. 총체적인 점검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철도청 관계자조차 “크게 보면 승객도 똑같이 감전 위험에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라고 걱정했다.

‘KTX가 대한민국을 확 바꿉니다’라는 표어가 전국의 방방곡곡에 붙어 있다. KTX는 대한민국을 바꾸기 전에 KTX 내부부터 바꾸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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