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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도 경주에 개발 논쟁 뜨겁다

경주, 경마장·고속전철 건설 놓고 시끌벅적…주민은 찬성, 학계는 “유적 망친다” 반대

경주·蘇成玟 기자 ㅣ 승인 1995.05.18(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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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세계적인 유적 도시 경주가 고속철도 및 경마장 건설을 둘러싼 학계와 경주 시민들 간의 찬반 대립 속에서 도시의 운명이 바뀔지도 모를 갈림길에 놓여 있다.

학계는 지난 3월 경주 문화재 보존을 위한 16개 학회 명의의 건의서를 청와대와 국회에 제출했다. 같은 달 한국고고학회·한국미술사학회 등 16개 학회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같은 목적으로 공개 세미나를 열려고 했다. 그러나 경주 시민들이 회의장을 점거하고 진행을 방해해 세미나는 무산됐다.

이런 대립 상황에서 5월27일 한양대에서 열릴 전국역사학대회를 앞두고 학계는 자기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정부에 대해 항의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경주 개발 계획을 저지하려는 범국민 서명운동이나 언론 매체를 통한 정부 비판이 그것이다.

한편 경주 시민들은 학계의 이같은 움직임을 적극 저지할 방침이다. ‘고속전철 역사·경마장 경주 사수 범시민 대표단’의 김성수 단장(54·경주상가발전협의회장)에 따르면, 학계의 운동에 맞서기 위해 이미 2천여 시민이 대표단에 가입했다.

경주 시민은 개발에 따른 단순한 이익이 아닌 생존권 수호를, 학계는 한번 파괴되면 복구가 불가능한 문화 유적 보존을 명분으로 내건 채 서로 ‘결사적’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다.

“경주의 폐를 가를 것인가”

경주는 79년 경주도시정비계획에 의해 지금까지 건물의 고도를 제한하고 있다. 또 문화재 보호 구역에 대한 개발 제한으로 재산권을 마음대로 행사하지 못하며 살아 왔다. 정부는 관광 자원 개발이라는 명분만 강요해 왔을 뿐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데 따른 적절한 보상을 소홀히 해왔다.

도시 미관을 이유로 79년 도시계획 때 경주 시가지의 고도를 7∼25m로 제한해 높은 빌딩이 들어설 수 없게 했다. 당시 경주 도시계획 책임자였던 박병주 홍익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최저 높이를 7m로 제한한 이유는 첨성대 높이가 9m17cm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문화 유산인 첨성대나 왕릉들이 주변 건물이나 숲에 가려 왜소하게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유적들과 비교적 거리를 두고 있는 경주역 주변 건물들만 25m(8층 높이) 이하로 제한이 다소 덜하다.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지정된 문화재 보호구역 안 건물의 증·개축은 일절 허용치 않았다. 또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다가 유물이나 유구를 발견하면 발굴비를 건축주가 부담해야 한다. 이런 불리한 조건 때문에 80년대 부동산 경기가 상승할 때도 이 지역 땅값은 제자리 걸음만 했다. 경주시에 따르면, 보존지구나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묶인 경주 시가지의 땅값은 평당 10만∼20만원 수준이다.

반면 북천 북쪽에 있는 동천동·용강동의 땅값은 평당 2백만원 안팎에서 6백만∼7백만원까지 호가한다. 보호 구역 밖에 있는 덕분에 개발 가치가 높은 데다, 이 지역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경주시청 김헌두 공보관에 따르면, 과거에는 경주시 중심지의 황남동 땅 한평 값이면 동천동·용강동 땅 20평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황남동 공시지가는 현재 평당 20만∼30만원이다. 이런 탓에 보호구역 안의 땅은 매매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김공보관은 “이런 형편이니 시민들이 악밖에 더 남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학계는 현재 계획된 고속철도 노선이나 경마장 부지가 천년 고도 경주를 회생 불가능한 지경까지 파손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김종철 교수(계명대·사학)는 “아무리 대통령 공약 사항이라지만 지킬 수 없는 것을 약속했으므로 이제라도 취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우선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이 92년 확정 발표한 계획 노선인 ‘대구∼영천∼경주시 북서부∼경주시 탑정동(북녘들)’의 32km 구간에서 확인된 유적지만 42개소에 달한다. 발굴이 불가피한 유적 13개소, 직·간접으로 영향받는 유적 29개소를 합한 수치이다.

또 경주시 북서부에서 역이 들어설 탑정동까지 지상 높이 16∼20m 및 길이 7km에 이르는 고가 선로가 건설될 예정이다. 이는 경주를 동서로 가르는 분할선이 되어 미관을 해치고 극심한 소음을 유발할 것으로 보인다. 김병모 교수(한양대·한국고고학회장)는 조선총독부가 신라시대 호국 사찰이던 사천왕사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절터를 가로질러 철로를 놓았던 사실과 비교하면서 고가 선로 건설을 비난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경주의 심장부를 째었다면 이제는 자국민들에 의해 경주의 폐가 갈라지는 셈이다”라고 표현했다. 또 68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당시 방내리 1.7km 구간에서 고분이 1백3개나 깨진 점을 예로 들며 고속전철 공사는 그보다 휠씬 심한 유적 파손을 부를 것으로 전망했다.

타협점은 고도보존법 제정과 신도시 건설

김종철 교수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경마장 건설을 반대했다. 첫째, 부지로 선정된 경주시 손곡동·물천리 일대에 막대한 문화재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일대는 신라 시대 대규모 취락지로서, 온전히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유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경주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6∼11월 실시한 지표 조사에 따라 확인된 유적만 고분군 7개소·토기요지군 2개소·와편산포지 1개소 등이다. 이 때문에 경마장 완공은 97년에서 99년 10월로 연기됐다.

둘째, 역사와 문화의 도시 경주가 유흥도시라는 인상을 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자연 환경과 인문 환경의 훼손이다. 경마장에 이르는 4차선 진입로 2개가 생겨나고, 각종 위락 시설이 조성되면 29만평에 이르는 자연이 파괴될 것이다.

경마장을 건설하면 유적 파괴는 불가피하다. 86년부터 93년까지 경주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이난영 교수(동아대·고고미술사학)는 “경주는 땅만 팠다 하면 유물이 나온다. 그것도 층층이 나온다. 통일신라에서 신라, 어떤 때는 선사시대 유물까지 나온다. 특히 현 경마장 부지는 훼손되지 않은 유적지여서 알려지지 않은 유물·유적이 얼마나 더 나올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경주 시민과 학계의 대립은 타협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양측의 관심 사항을 종합해 보면 의외로 상당히 넓은 공감대가 있다. 고도보존법과 그에 따른 신도시 건설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학계는 이미 지난 3월 청와대·국회 등에 제출한 건의서에 고도보존법과 신경주 건설을 대안으로 제출했다.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고도보존법의 주요 내용은 정부가 고도의 토지를 매입하고 주민들에게는 신시가지에 살도록 대토를 주는 것이다. 또 관광객들이 내는 입장 요금을 목적세로 전환해 토지 매입에 쓰자는 것이다.

경주시민 대표인 김성수 단장은 고도보존법을 반드시 제정해야 한다면서 “학회가 시민은 무시한 채 생존권이 걸린 문제를 좌우하려 든다. 학회가 경주에 내려와서 시민들과 협의해 절충안을 내야 할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고속전철 노선이나 경마장 부지에 문제가 있다면 학자들과 토론해 대안을 모색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김종철 교수는 “주민들을 보호하지 않으면서 고도를 보존할 수는 없다. 제한만 했지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으니까 문화재보호법이 문화재파괴법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건물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유물이 나오면 매장문화재로 지정되어 온갖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데 누가 쉽게 신고하려 들겠느냐고 그는 말했다.

이난영 교수는 80년대 후반 어느 경주 시장이 취임석상에서 “경주에는 무덤(왕릉·고분)과 관광객이라는 두 개의 혹이 있다”고 말한 사실, 그리고 어느 경북 도지사가 “잘 생긴 고분 두어 개만 남기고 모두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을 예로 들며 문화재에 대한 공무원들의 무지를 문제로 지적했다.

주민·학계 “중앙 정부가 나서라”

학자들은 이러한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예로 경주시 북천 북쪽에 들어선 고층 아파트군을 든다. 박병주 교수는 “경북도지사나 경주시장이 자리를 내걸고라도 결사적으로 막았어야 했다. 고도제한 지역 밖이라지만 그에 준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주시청 공무원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김헌두 공보관은 “짓지 말도록 권장하면 과거에는 순응하는 편이었으나, 이제는 소송을 걸어 이기는데 무슨 수로 막겠는가”라고 말했다. 손수제씨(경주시 도시과)는 과거에는 고층화에 대한 수요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면서 “인구는 느는데 시가지 안은 꼼짝 못하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라고 말했다.

결국 학계와 경주 시민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양측 모두 입을 모은다. 이난영 교수는 “경주는 지금 최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금 잘못 결정하면 경주는 완전히 제 면모를 상실할 것이다. 이 문제는 이제 경주 시청이나 경북 도청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민 대표 김성수 단장도 “정부가 적극 개입해 중재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경주가 무너지면 부여·공주 같은 백제 문화권의 다른 고도에도 파급 효과가 미칠 것이라는 점 때문에 학계의 우려는 심각하다. 그러나 고도 보존이라는 명분만으로 시민들에게 한없는 불이익을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정부가 조정 역량을 발휘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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