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시민도 고개 젓는 ‘경남고 동문 정치’
  • 박병출 부산 주재기자 ()
  • 승인 1995.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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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출신 등 PK 인맥 요직 독점해 지역감정 해소 물거품
9월16일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김기수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김총장은 선이 굵고 통솔력이 뛰어나면서도 업무 처리에는 치밀한 성격이어서, 김대통령의 집권 후반기를 받쳐줄 적임자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서울지검장·법무부 검찰국장·대검 중수부장 등 검찰 요직을 거치지 않았고, 사시(2회) 출신으로는 처음 검찰 총수에 오른 ‘발탁 인사’라는 점에서 ‘꼭 그래야만 했을까’라는 뒷말이 무성하다.

이 말은, ‘또 경남고 출신이냐’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정확해 보인다. 심지어 부산 지역에서조차 “대통령이 부산·경남 출신을 지나치게 중용해 부산을 오히려 궁지로 몬다”고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동안 민간 차원에서 기울여 온 지역 감정 타파 노력이 평가절하되고, 지역 내에도 소외 그룹이 형성되는 등 미묘한 ‘인사 후유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번 인사는 안우만 법무부장관(경남고 10회)과 박일룡 경찰청장(13회)에 이어 검찰총장까지 경남고 출신(12회)으로 채운 점이 특히 눈에 띈다. 검찰청·경찰청과 함께 3대 외청인 국세청도 경남고 동문인 추경석 청장(8회)이 장악하고 있다.

군 조직에도 윤용남 육군 참모총장과 남정명 해군 참모차장(부산고) 김홍래 공군 참모총장(경남중) 이상무 해병대 사령관(동래고) 등 이른바 PK(부산·경남) 출신이 포진해 있다. 최근에 부산 북구 을 조직책에 임명된 정형근 전 안기부 1차장 또한 경남고 출신이다. 청와대 안에는 역시 경남고 출신인 배재욱 사정비서관, 경남 김해 출신 한이헌 경제수석이 버티고 있다.

노재봉 전 총리는 이를 두고 ‘고등학교 동문 정치’라는 표현을 썼다. 사실 부산 시민들은 다른 지역, 특히 광주에 대해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4·19는 물론 79년의 ‘부·마 항쟁’이나 87년 ‘6월 항쟁’등 언제나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지만, ‘5월 광주’의 희생과 비교하면 부산은 ‘6·29 선언 도출’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해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채무감이다.

이같은 자각은 지역 감정 해소를 위한 다양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대학 교수와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 결성한 ‘영·호남 민간인협의회(부산지역 회장 설광석)는 매년 부산·광주지역 청소년 민박 교류, 예술단체 교환 공연 등을 펼치고 있다. 부산·경남 젊은 시인회의(의장 김태수)는 두 지역에서 번갈아 문학 세미나를 개최하고 합동 시집을 펴내는 등 ‘문학을 통한 영·호남 길 트기’를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삼고 있다. 또 가락종친회는 매년 영·호남의 중간에서 ‘남도 한마음 축제’를 열어 김해 김씨· 허씨, 인천 이씨 등 씨족 교류를 통한 지역 화합이라는 이색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밖에도 ‘영·호남 미술제’ ‘영·호남 사돈맺기’ 등 비슷한 성격의 민간 활동이 수십 개에 달했다.

“골품 제도가 되살아난다”

이들은 김영삼 정부의 ‘부산 편애’가 그동안 시민들이 기울인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걱정한다. 부산·경남 젊은 시인회의 창립 회원인 최영철 시인은 “문민 정부의 인사라고 말하기에는 지역 편중이 너무 심하다. 영·호남의 심정적 거리가 더 멀어지는 것은 물론, 점증하는 대구·경북의 박탈감도 지역 감정 형태로 변모해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남고 출신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산 한 대학의 경남고 출신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 “특정 출신에 의한 요직 독점은 과거 군사 정권 시절의 구악이다. 이를 가장 우선적으로 척결해야 할 문민 정부가 같은 틀을 못벗어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부산에는 경남고 외에도 개교 백주년을 맞은 부산고·동래고·부산상고 등 전통있는 명문고들이 건재해 있다. 지역 내에서 이들이 느끼게 된 상대적 소외감도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일반 시민들은 ‘도매금’으로 입방아에 오르는 것부터 불쾌해 한다. 이른바 ‘성골론(聖骨論)’이다. 자민련 안성열 대변인은 9월20일 “신라 시대의 골품제도가 되살아나고 있다. 부산·경남 출신은 진골, 여기에 경남고 출신이면 성골”이라고 비아냥거렸다.

‘6두품’시민들은 이래저래 김대통령에게 원성이 높다.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로 마지막 ‘의무’를 다한 부산의 민심은 ‘PK 중용’으로 오히려 더 냉각되는 결과를 낳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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