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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치 사는 곳에 기름 탱크라니"

분당·용인 지역에 국내 최대 저유소 건설…주민들 ‘위험’ 내세워 반대 투쟁

許匡畯 기자 ㅣ 승인 1995.07.06(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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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곡식과 채소가 한창 자라는 이맘때면 농촌 일손도 바쁘게 마련이다.

부지깽이도 들일에 따라나선다는 농번기지만, 작은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과 대장동,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주변 논밭에는 대낮인데도 농민들이 일하는 모습을 찾기 어렵다. 이 지역은 도시에 속해 있지만 울창하게 우거진 산림 사이로 넓지 않은 논밭이 펼쳐진 전형적인 도심 주변 농촌 마을이다.

군데군데 밭에서는 주민들의 큰 소득원인 화훼가 보살피는 손길 없이 말라가고, 벼대신 잡초가 자라는 논 옆으로는 지난 봄 모내기철에 쪄내지도 못한 모판에 모가 그대로 말라 죽어 있다.

마을 주민들은 논과 밭을 버리고 이 마을 야산 부근에 모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곳은 대한송유관공사가 세우려는 수도권남부저유소(기름 저장소)가 들어서기로 예정된 곳이다. 현재 벌목과 부지 조성 공사가 한창인 이곳에 내년 10월 공사가 끝나면 넓이 27만5천평에 기름 탱크 41개(용량 1백97만3천 배럴)를 갖춘 국내 최대 규모 저유소가 건설된다.

공사 현장은 버들치 사는 청정 지역

농사를 작파한 주민들은 공사장 부근 마을 도로에 나와서 공사를 막으려 애쓰고 있다. 황톳길 군데군데 폐타이어를 쌓아놓고, 공사장 입구에는 아예 큼직한 천막을 2개 쳐놓고 가마솥까지 내걸었다. 주민들은 낮에는 물론 밤에도 돌아가며 현장에 나와 공사장에 출입하는 차량을 막고 있다. ‘상황’이 벌어지면 다른 주민에게 급히 알리기 위해 나무에 종도 매달아 두었다.

차량 통행이 뜸해 늘 조용했던 마을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한 것은 작년 4월 이 지역이 저유소 부지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대한송유관공사가 이곳에 대규모 기름 탱크를 짓는다는 소문이 돌면서 주민들은 불안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소문은 곧 사실로 확인되었다. 작년 4월 열린 성남시의회에서 저유소 설치가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6월에는 대한송유관공사가 연 주민설명회가 주민들 반대로 무산됐다. 이때부터 공사를 추진하는 대한송유관공사측과 주민 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민의 반대 속에서도 사업은 하나하나 추진됐다. 8월에는 건설부(지금 건설교통부)가 저유소를 국가 사업으로 입안해 도시계획시설로 결정, 고시했다. 12월에는 환경영향평가가 승인됐고, 이에 따라 올해 1월7일 통상산업부는 저유소 설치를 허가했다. 올 봄부터 공사 지역에 빽빽하던 나무를 베어내고 굴삭기와 대형 트럭이 들락이며 터를 닦기 시작했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주민들이 공사장 출입 차량을 막고 있기 때문에 공사장 안에 들어와 있는 중장비나 덤프 트럭은 고립된 섬 안에 갇힌 꼴이 됐다.

대형 공사장인데도 현장 사무소용 간이 건물도 없다. 다만 컨테이너를 10여개 겨우 들여다가 사무실로 쓰고 있다. 시공자인 LG건설은 현장 차량용 연료나 공사에 필요한 장비를 충당하려면 어쩔 수 없이 ‘작전’을 벌여야 한다. 마을 주민의 포위망을 뚫고 길을 터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닷새가 멀다고 주민들과 충돌한다. 욕설과 몸싸움은 예사며, 충돌이 빚어질 때마다 주민이 다친다. 6월16일에는 성남경찰서 소속 전투경찰까지 투입되어 동네 주민과 몸싸움을 벌였다.

저유소 공사를 막으려는 주민의 의지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5월24일에는 주민 1백50여 명이 동네 차량 30여 대에 나누어 타고 서울 광화문으로 시위하러 나섰다가 5분 만에 해산되기도 했다.

주민들이 저유소 설치를 반대하는 것은, 수도권에서는 보기 드물게 자연 환경이 뛰어난 마을에 주민 의견 한번 들어보지 않고 위험한 시설을 무리하게 세운다는 생각 때문이다.

저유소가 들어설 분당구 석운동 7~7, 대장동 산 41`~1 일대는 해발 2백여m 가까이 되는 산지이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 같은 활엽수가 촘촘한 이 지역은 아랫쪽의 낙생저수지와 어울려, 가까운 수도권 사람들이 즐겨 찾는 천연 유원지이다. 성남·과천·의왕· 수원 같은 도시에 둘러싸인 이 지역은 수원 광교산과 과천 청계산을 잇는 녹지대이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앞 시내에는 수질등급 1등급에서 살 수 있는 버들치가 서식하며, 저수지에 사는 빙어들이 산란하러 올라오는 청정 지역이라는 것이다. 보존녹지 지역으로, 지난 20여년 동안 여러 가지 규제에 묶여 화장실 하나 제대로 고치기 어려웠던 주민들은, 여러 가지 명분을 내세우며 들어서는 대규모 저유소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한송유관공사는 이미 다른 곳에 저유소 터를 마련해 공사 계획을 세웠다가 주민 반대로 물러선 경험을 갖고 있다. 91년에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에, 92년에는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개발제한구역에 저유소 터를 잡으려 했으나 주민들 반대가 심하고 지방의회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좌절됐다. 주민들은 분당구 석운동과 대장동 지역이 보존녹지 지역이어서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 까다롭기 때문에 적당한 땅으로 꼽힌 것으로 보고 있다. 해당 지역 땅 소유자가 마을 주민이 아니라 한 건설회사 소유로 되어 있어 땅을 사들이기 쉬웠을 것이라는 점도 좋은 조건이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주민들이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위험’이다. 엄청난 양의 기름을 저장한 탱크 옆에서 불안에 떨며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저유소 터로부터 불과 3백m 떨어진 바로 옆 산중턱에는 시설용량 3백45kv인 신성남변전소가 자리잡고 있다. 이미 들어선 변전소 바로 곁에 대규모 기름 탱크를 짓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주장이다.
“사고 나면 서울 남부까지 피해”

주민들은 작년 11월 이집트에서 발생한 원유 탱크 폭발 사고를 예로 든다. 벼락이 떨어져 기름 탱크가 폭발하자 불붙은 기름이 한 마을을 덮쳐 사상자가 수백명이나 나왔던 이 사건은, 마을 주민들이 저유소 건설을 극구 반대하는 경험적 명분이 되고 있다. 게다가 새로 건설할 저유소에 저장할 기름은 원유가 아니라 정유공장에서 가공된 휘발유·항공유·등유·경유 등 정제유이기 때문에 폭발할 위험이 더 크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불안감은 저유소가 들어서는 시골 마을에 그치지 않고 주변 대단위 주택지로 번져나가고 있다. 저유소 터에서 서쪽으로 불과 4㎞에는 분당 신도시가 들어서 있고 남쪽에는 용인 수지 신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 주민들 역시 사고가 나면 직접적인 피해 지역이 될 것으로 걱정하고 있다. 공사 현장 주민들은 만일 사고가 난다면 저유 용량으로 미루어 주변 주택단지는 물론 인근 도시와 서울 남부까지 안심할 수 없는 정도라고 말한다.

이같은 우려를 반영하듯 현지 주민 대책위원회와는 별도로 ‘수도권남부저유소 설치에 대한 수도권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6월16일 결성됐다. 대책위에는 성남지역 40여 단체, 수원 8개 단체 등 모두 60여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 중에는 분당 지역 아파트부녀회도 있고 입주자대표회도 들어 있다.

공동대책위원회 이재명 집행위원장(변호사)은 “액체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므로 송유 시설물은 저지대에 건설하는 것이 원칙이다. 지금처럼 산 중턱에 탱크를 지어놓으면 유사시에 분당 지역을 비롯해 성남 시흥 과천 안양 의왕 수원 용인 등 주변 지역 모두가 위험 범위에 들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저유소 공사를 추진하는 대한송유관공사측은 이같은 걱정이 기우라고 주장한다. 공사측은, 저유소 시설은 안전이 생명이므로, 국제 공인된 설계 기준과 소방법에 따라 시공하여 안전에 문제가 없고 지진 같은 외부 충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시공한다고 밝혔다. 만일 불이 나더라도 첨단 자동 소화 설비가 작동하므로 확산될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송유관공사측 주장은 적어도 현지 주민에게는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주민들이 떠올리는 것은 몇년간 계속된 대형 참사, 특히 서울 아현동과 대구에서 벌어진 가스 폭발 사고이다. 시설을 아무리 잘 갖추었더라도 인공 시설물은 위험성을 안고 있게 마련이며, 이 위험성은 언젠가 현실화된다는 것이 주민 생각이다.

저유소란 해안 지역에 위치한 정유공장에서 생산한 석유 제품을 송유관을 통해 소비지인 내륙 대도시 주변으로 수송해 저장하는 시설이다. 문제가 되는 수도권남부저유소는 울산·온산·여천에서 정제한 기름을 호남 구간 4백61㎞와 영남 구간 4백39㎞ 송유관으로 운반해 저장할 시설이다.

송유관공사는 이 사업이 기름을 생산 공장에서 소비지까지 지하 배관으로 수송하므로 교통 체증을 덜고, 수송하는 데 드는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으며, 환경에도 도움이 되는 국가 정책 사업이라고 말한다. 또 문제의 지역을 저유소 터로 선택한 것은, 최종 소비지까지 수송 거리가 짧고 교통이 편해야 하며, 충분한 면적이 필요한 저유소 부지 조건상 수도권 남부 지역에서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여러 곳에 나눠 설치해 위험 줄여야

저유소 공사를 반대하는 주민들도 이 사업이 국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는 점은 인식하고 있다. 다만 주민과 한마디 상의 없이 지역을 정해 청정 지역으로 유명한 곳의 숲을 마구 벗겨내는 밀어붙이기식 행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더구나 공사측이 지역개발비 명목으로 성남시에 20억을 맡긴 것은 불 붙은 여론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 주민들은 자기들을 대화 상대로 보지 않고 조용히 돈이나 타가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분노하고 있다.

주민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사업 추진과 관계된 모든 행정을 공개하고, 사업을 주민과 협의하면서 진행하며, 저유소를 이처럼 대규모로 몰아서 세울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분산해 설치함으로써 위험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유관공사측은 경제적 이유를 들어 저유소 위치나 규모는 협상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했다. 따라서 저유소 공사를 둘러싼 마찰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현지 주민들이 공사를 막고는 있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물리력이 동원되어 강제적으로 공사가 시행되고 있어 주민 대응에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다만 최근 분당과 수지 지역 등 인근 대단위 주택단지를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급속히 확산돼 큰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또 한 가지 변수는 이번에 뽑힐 민선 성남시장의 역할이다. 지난 6월19일 성남시민회관에서 열린 성남시장 입후보자 초청 토론회에서 입후보자 7명 전원이 저유소 설치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따라서 이들 중 누가 시장으로 뽑히더라도 확산되는 반대 여론을 배경 삼아 부정적 입장을 취할 것이 명백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에 따르면 원래 회사나 정부는 지방 선거를 의식해 선거가 끝날 때까지는 강제로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시장 후보가 반대 일색이라 선거가 끝나도 사업 추진이 쉽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약간 무리하더라도 공사를 어느 정도 진행시켜 저유소 건설을 기정사실화하고, 반대 여론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려 사업을 계속 추진한다는 쪽으로 수정했다는 것이다.

6월22일에는 새벽 2시에 상황이 벌어졌다. 자다가 급히 달려온 마을 주민과 차량을 통행시키려는 현장 인부들 간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물론 주민은 인부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얼마 후 포위망은 뚫리고 대형 차량들이 부리나케 드나들었다. 이 와중에 또 마을 주민 몇이 다쳤다. 최근에 투입된 공권력 때문에 주민들은 국가도 자기 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하루를 긴장과 경계, 몸싸움으로 보내는 현지 주민들은 마을 정서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낯선 외지인들이 공사를 강행하려고 주민을 이간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에 핏발이 선 것이다.

수지면 고기리 고기교회 안홍택 목사는 “조용한 시골 마을 사람들이 싸워보길 했나, 데모를 해봤나…. 순진한 촌사람들이지만 대대손손 해를 입게 생겼는데 한가하게 농사나 지을 수는 없다. 저유소 사건은 주민을 무시하는 전근대적 행정이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훌륭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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