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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청산되지 않은 안기부의 ‘5공 비리’

박종철 사건 축소·은폐·조작에 깊숙이 개입

기자 ㅣ 승인 1995.04.27(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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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은 지난호에 최근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동아일보사 발행)라는 책을 펴낸 안상수 변호사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박종철 사건 수사 검사의 일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한 역사적 사건(주검)과 운명적으로 만난 한 수사 검사의 일기를 토대로 쓰여진 것이다. 안변호사는 “8년 전 박군 사건 수사를 처음 맡을 때부터 이 사건이 정치 권력에 의해 묻힐지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언젠가 때가 되면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기를 썼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저자가 ‘나는 박군 사건에 대해 내가 아는 사실, 내 주변에서 있었던 일과 내가 했던 고민을 모두 기록했다’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익명의 인물이 한 사람 등장한다. 박군 사건 축소·은폐·조작을 주도한 관계기관대책회의와 박군 사건을 맡은 검찰 수사팀 사이에서 조정역을 맡은 ‘안기부 J단장’이 바로 그이다. 안변호사와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J단장은 검사 출신 정형근 전 안기부 1차장임이 밝혀졌다.

‘안기부 J단장’은 정형근씨

그후 <시사저널>은 정씨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그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해주었을 뿐 인터뷰는 끝내 고사했다. 자신의 역할은 ‘메신저였을 뿐’이기에 ‘거기(관계기관대책회의)에 대해 말할 입장이 못된다’는 이유였다. 안변호사의 책에 등장하는 다른 실명 관련자들도 인터뷰를 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변호사 인터뷰와 책을 토대로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재조명해 보면 이렇다.

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한 운동권 대학생의 ‘변사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 남영동 대공분실을 관내에 둔 용산경찰서가 서울지검 형사2부에 보낸 ‘변사 사건 발생 보고’에는 변사자 인적 사항이 ‘직업 학생(서울대), 이름 박종철, 연령 만 21세’라고 기록돼 있었다. 사인은 ‘불상’이었다. 그러나 이 변사 사건은 곧 고문 치사 사건임이 밝혀지고(1차 사건), 나중에는 천주교 사제단의 폭로로 사건이 축소되었다는 것이 드러나고(2차 사건), 박군 사건 1주기를 맞이해 수사 검사(안상수 변호사)와 부검의(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의 폭로로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처음부터 이 사건을 조작·은폐하려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3차 사건).

그러나 이 사건의 축소·은폐·조작을 결정한, 안기부가 주도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구성원과 그 운영 및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런 점에서 대책회의와 검찰 수사팀 사이에서 조정역(메신저)을 맡은 안기부 J단장(정형근 수사단장)의 역할을 밝힌 안변호사의 책은 대책회의에 관한 의혹을 규명하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안변호사는 이 사건 초기부터 안기부가 개입했음을 밝히고 있다. 안검사(당시)는 박군의 시신을 부검한 이튿날(1월16일) 정구영 검사장에게 부검 결과(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를 보고한 뒤 안기부에 가보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게 된다. 물론 이때는 이미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열려 대책이 논의된 시점이다. 여기서 일을 저지른 경찰 쪽은 심장마비사(은폐)를, 검찰은 고문 치사(공개)를 주장했다. 이를 조율해야 할 안기부는 정확한 정보(사실 확인)가 필요했다. 그래서 경찰과 검찰 양측의 실무 책임자(박처원 치안감과 안상수 검사)를 불러 조사하는 실무 책임을 정형근 수사단장에게 맡긴 것으로 보인다.

안기부에서 정단장은 안검사에게 이 사건을 묻을 수 있는지와, 적어도 직접 사인은 고문이 아니라고 은폐할 수 있는지 물었다. 자칫 이 사건이 영원히 묻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단장은 사실 그대로 공개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안검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 자리에서 그와 같은 취지의 보고서를 썼다.

다음날 오후에 열린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결론은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는 쪽으로 내려졌으나 진상 조사에 끝까지 반대하던 경찰측이 “그렇다면 조사 작업은 우리들에게 맡겨 달라”고 요구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검찰 수사팀에 전해졌다. 1월20일에는 치안본부장과 내무부장관을 강민창씨와 김종호씨에서 각각 이영창씨와 정호용씨로 교체한 여론무마용 문책 인사가 단행되었다. 관계기관대책회의는 검찰에 2월24일까지 4일 동안 수사를 마치고 그 결과를 밝히도록 요구했다. 들끓는 여론을 속전속결로 잠재울 의도였다. 그러나 잘못 끼운 첫 단추는 나중에 2차, 3차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검찰뿐만 아니라 정권의 존립 자체를 뒤흔들었다.
사건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불거졌다. 이 사건 피의자로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조한경 경위가 안검사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 왔고, 2월27일 접견 과정에서 조경위는 안검사에게 공범이 3명 더 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강진규 경사도 마찬가지 고백을 했다. 안검사는 즉시 상부에 공범이 더 있다고 보고하고 재수사 지시를 기다렸다. 치안본부장(이영창)이 제외된 채 내무부장관(정호용)·법무부장관(김성기)·검찰총장(서동권)·안기부장(장세동)이 모인 대책회의에서 이 문제를 조사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검찰 수사팀에 전해졌다.

그러나 경찰이 두 고문 경관을 의정부교도소로 이감했다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졌다. 뒤이어 박처원 치안감 등 치안본부 관계자들이 거의 매일 두 고문 경관을 특별 접견해 이들을 회유한다는 정보가 검찰에 입수됐다. 물론 이같은 은폐 공작은 경찰의 독자적 결정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안기부가 결자해지 차원에서 경찰에 해결을 맡긴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또 당시 대책회의의 주요 멤버인 안기부 차장은 치안본부장 출신인 이해구씨였다.

관계기관 대책회의 “검찰이 양보하라” 통보

대책회의 결과는 3월21일 검찰에 통보되었다. 결론은 덮는 쪽이었다. 대책회의에서 표명된 안기부의 입장은 “검찰도 경찰도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조직인데, 나라를 위해 검찰이 양보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니냐”라는 것이었다. 게임은 검찰의 완패로 막을 내렸고, 얼마 안가 4·13 대통령 특별담화(호헌 조처)가 발표되었다.

호헌 조처가 내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대책회의에서 검찰(법무부)의 입장은 ‘깨자’는 쪽이었다. 그러나 당시 권력 기관에서는 검찰을 형사소송법상의 수사 주체라기보다는 ‘법무 참모’쯤으로 취급하는 그릇된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검찰 수사팀에 대한 안기부의 최종 주문은 정형근 수사단장을 통해 내려왔다. 정단장의 요청으로 신창언 부장검사와 안검사 3인이 5월11일 오후 2시 반에 장충공원 앞 앰배서더호텔 1817호실에서 마주앉았다. 정단장은 상부로부터 검찰에 다음 세 가지 사항을 협조 요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전했다. “구형은 7년, 1심 선고는 5년 정도만 되도록 해달라. 김무삼 변호사를 설득해 사임케 해달라. 신부장이 조한경을 만나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일을 하지 말아 달라.” 정단장은 또 이 자리에서 “이 사건은 묻혀야 하고 또 묻힐 수 있다. 최악의 경우 훗날 깨져도 할 수 없지만 지금은 안된다. 1심만 무사히 지나면 영원히 묻힐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 안기부의 입장이다”라고 재삼 강조했다.

그러나 안기부의 판단과 달리 1심 재판이 열리기도 전인 5·18 추도 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에서 사건 축소 조작이 폭로되었다. 사제단의 폭로는 5·26 전면 개각으로 이어졌다. 이후 이 사건은 박군 1주기를 맞아 <동아일보>의 안상수 변호사 인터뷰 및 황적준 박사 일기장 공개를 통해 3차 사건(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에 대한 직권 남용 및 직무 유기 혐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의 축소·은폐를 주도한 관계기관대책회의와 관련해 정치적 책임을 진 ‘관계자’는 1명도 없다. 이들 중 현직 국회의원만도 김종호·이영창·이해구·정호용씨 등 4명이나 된다. 모두 민자당 의원이다. 6월항쟁 이념을 계승했다는 김영삼 정권에서 6월항쟁을 촉발시킨 고문 치사 사건의 은폐·조작 당사자들이 핵심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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