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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버린 농민 후계자 ‘우후죽순’

융자금만 받고 이농·전업·영농 포기…사후관리 부실·정책 뒷받침 부족이 원인

나권일 광주 주재기자 ㅣ 승인 1995.11.09(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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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한창이던 지난 10월11일 전남 지역의 한 농촌 들녘에서는 전대 미문의 절도 사건이 발생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수확을 앞둔 논 9백평 가운데 7백여 평에서 다 자란 벼(일반벼 60㎏들이 25가마 분량)를 밤새 누군가가 콤바인으로 베어가 버린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범인은 이웃 마을에 사는 25세 청년으로 밝혀졌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객지를 떠돌다 고향에 정착한 이 젊은이는 남의 논 6천평을 위탁 영농하다가 최근 구입한 콤바인 대금을 갚지 못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공교롭게도 이 청년은 사건 직전인 10월5일 어렵게 ‘농민 후계자’로 선정된 것으로 알려져 마을 사람들은 씁쓰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행정 당국이 무성의하게 후계자를 선정해 다른 농민 후계자들의 얼굴에 먹칠을 한 이 사건은, 근본 대책이 필요한 우리나라 농어민 후계자 제도의 명암을 드러낸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갈수록 인기가 시들어가는 농어민 후계자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로 후계자가 되려고 경쟁했던 것도 옛날 일이다. 지난해 전남 고흥군에서는 한 사람의 탈락자도 없이 신청자 전원이 후계자로 선정됐을 정도다. 올해 전라남도의 평균 경쟁률은 1.5 대 1에 그쳤다.

전체 후계자 중 13.4% 중도 포기

농어민 후계자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 내용에 대해 후계자들은 할 말이 많다. 축산이나 원예의 경우 시설 투자를 제대로 하려면 보통 1억~2억원이 들어가는 실정인데, 정부 융자금 1천5백만~3천만원(연리 5%)으로는 마음먹고 해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의 농업정책이 오락가락하고 농산물 유통 체계가 불안해 한두 번 실패라도 할 경우 그대로 빚더미에 앉고 만다.

농민 후계자들 가운데 융자금을 갚을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연말마다 대출금 이자 갚기에 급급하다 보면 영농 의욕은 오간 데 없게 되고, 살길을 찾아 부업을 찾거나 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중도에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연말 후계자 선정 때만 되면 후계자로 지정 받아 융자금을 받는 즉시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가게를 차려 한몫 보려는 사이비 신청자들이 줄을 선다.
지난 10월 전라남도가 국회 농수산위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남 지역 농어민 후계자 1만5천여명 가운데 16%인 2천4백여 명이 중도에 탈락했다. 도시로 이주했거나(53%) 무단 이탈했으며(22.5%), 농촌에 살더라도 전업한 사람(11.8%)이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지급된 자금 가운데 회수되지 않은 돈도 49억여 원이나 된다. 광주광역시 농어민후계자연합회 류상선 회장은 도시 근교나 농촌 지역에 거주하되 사실상 영농을 포기하고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까지 고려한다면 부실한 농민 후계자가 30%를 넘을 것이라고 말한다.

농림수산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농어민 후계자는 현재 모두 7만6천4백78명이다. 매년 만명씩 선정해 2004년까지 15만명을 농민 후계자로 육성해 21세기 농업을 짊어지게 하겠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다. 그러나 농민 후계자 제도가 시행된 81년부터 95년 6월까지 중도 탈락한 후계자가 1만1천 여명으로 전체 후계자의 13.4%를 차지하고 있다. 생활 환경과 의료·복지 시설 낙후, 뒤떨어진 교육 여건도 이들의 이농을 부채질하는 요인이다. 농민 후계자가 중도에 탈락하면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이 나서서 융자금을 회수할 뿐 정부로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해마다 후계자는 만명씩 늘어나고 융자금 규모는 커지지만, 이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조차 없다.

농어민 후계자는 농수산업을 경영하고 있거나 경영할 의사가 있는 40세 미만 청·장년을 대상으로 시·군 농어촌발전심의회의를 거쳐 시장·군수가 선발한다. 지난해 3월부터는 도시 근교 농업 육성 계획에 따라 특별시와 광역시에 거주하는 농민도 후계자로 선정될 수 있도록 개선됐다. 또 후계자 제도와는 별도로 3년 이상 영농에 종사하면 ‘전업농’자격을 신청할 수 있다. 전업농은 5천만원을 융자 받을 수 있지만 까다로운 금융기관 대출 요건을 갖춰야 한다. 이 전업농도 실제로는 후계자 제도와 마찬가지로 농사짓는 데가 아닌 목적에 대출금을 사용하는 일이 허다한 실정이다.

우리나라 농어민 후계자 제도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는, 정부가 사후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점과 정책적 뒷받침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된다. 일단 후계자로 선정돼 융자금이 지급되면 그 돈을 사업 계획 외의 용도에 투자해도 마땅한 제재 장치가 없다. 농촌지도소와 행정기관이 분기 별로 실태조사에 나서지만 지도·감독은 형식에 그치고 만다. 농촌의 어려운 실정을 뻔히 알고 있는 감독관들이 후계자들에게 시정 지시를 할 수 없는 탓이다.
정부, 융자해 주고 난 뒤 ‘나 몰라라’

사업 확장에 따라 재투자가 필요한 후계자에 대해 정부가 할 수 있는 뒷받침도 거의 없다. 정부는 후계자로 선정한 뒤 한 번 융자해줄 뿐이다. 정부는 고정 자본만 투자하고 운영 자본은 후계자 스스로 알아서 마련하라는 셈이다. 따라서 목돈 없는 젊은 후계자들은 따로 빚을 내서 모험을 해야 한다.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도 ‘한 번 후계자는 영원한 후계자’가 된다. 강신욱 민주당 농림수산위 전문위원은 “현실적으로 후계자에 대한 사후 관리는 영농 지도와 교육을 담당하는 농촌지도소가 맡아야 하지만, 지도할 인력과 전문 교육 부족으로 형식에 그치고 있다. 우리나라도 독일이나 일본처럼 초보적인 후계자 과정을 거쳐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선진 농어가’로 선정하는 단계별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정부가 의욕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후계자 선정 과정의 잡음도 여전하다. 목돈을 쥐려고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정작 영농 의욕을 가진 젊은 후계자들은 풀이 죽을 수밖에 없다. 농민 후계자 이용호씨(27·전남 나주시 문평면)의 경우가 그렇다. 전남 나주시의 올해 영농 후계자 선정 인원은 1백53명으로 모두 22억9천5백만원이 지원됐다. 후계자 신청자가 넘치자 나주시는 1인당 융자금을 1천5백만원으로 줄였다. 대학에서 축산을 전공한 이씨는 지난해 뚜렷한 이유 없이 후계자 선정에서 탈락한 뒤 올해 후계자로 선정됐다. 축사 2백평을 짓는 데 2천만원 남짓한 돈이 드는 바람에 융자금 1천5백만원으로 부족해 또 대출을 받았다. 정작 젖소를 구입할 돈은 따로 마련해야 할 형편이다.

현재 나주시 농민 후계자는 8백89명인데, 이 가운데 실제 영농에 종사하지 않은 사람이 상당수에 달한다. 이른바 부실 후계자인 것이다. 시 당국과 농촌지도소가 실태 조사를 하지만 농촌의 인정상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일 한다는 것을 알고 눈감아준다. 후계자 인원에 맞게 균등 분배할 바에야, 농촌을 책임지고 열심히 일해볼 젊은 사람을 엄선해 충분한 자금으로 확실히 밀어줘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이씨의 주장이다.

“우리 농업의 마지막 희망”

농도인 전남의 경우 농가 인구는 한 해에 6만명씩 감소하고 있다. 60세 이상 농민이 30%에 육박하고 여성이 54%를 차지한다. 이러한 여건에서 우리나라 농업은 사실 후계자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지금처럼 정부가 국고 자금을 ‘눈먼 돈’이 되도록 방치한다면 젊은 후계자들의 영농 의욕은 꺾이고 이는 이농을 부채질하게 될 뿐이다.

전남농어민후계자연합회 류중수 회장은 이와 관련해 “전국 8만 농어민 후계자들은 앞으로 우리 농어촌을 지켜나갈 핵심이다. 정부가 고령화한 영세 소농에게 정착금을 지원해 이들의 경영권 이양을 장려하고 후계자들이 효율적인 규모로 영농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어민 후계자 제도는 시행한 지 15년이 되는 지금 큰 전환점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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