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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 원전, 증기 발생기 교체 사업 표류

원전 증기 발생기 교체 사업 ‘표류’ 위기… 기장군청의 이기심, 한전의 늑장 대응이 원인

成耆英 기자 ㅣ 승인 1998.01.15(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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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발전 분야에서 98년은 매우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는 6월 국내 처음으로 원전의 핵심 부품인 증기 발생기를 교체하는 공사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한국전력은 이미 3년 전부터 그동안 잦은 고장으로 안전성 논란에 휘말려 왔던 고리 1호기의 증기 발생기 2대를 신형으로 교체한다는 계획을 확정하고, 6월6일을 공사 착수 개시일로 잡아 놓은 상태이다.

그런데 여기에 예기치 않은 복병이 등장했다. 떼어낸 구형 증기 발생기를 보관할 마땅한 장소가 없어 이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증기 발생기는 원자로에서 발생한 열을 증기로 바꿔주는 원전의 핵심 부품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증기가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길이 20m에 지름이 4.5m나 되는 원통형 용기인 증기 발생기는 운전중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방사능이 누출되지 않도록 보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기장군청 “그린벨트 해제해 준다면…”

애초에 한전은 떼어낸 구형 증기 발생기를 따로 저장고를 지어 보관하지 않고 고리 원전 안에 있는 방사물 저장고를 개축해 여기에 방사성 폐기물 보관용 드럼통과 함께 보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96년 12월부터 97년 12월까지 1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관할 기장군청에 이 저장고 개축 허가를 신청했다. 건물 내부의 격벽을 옮기고 천장을 높여서 저장고 내에 구형 증기 발생기 2대를 보관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번번이 ‘반려’였다.

기장군은 허가 신청서를 반려할 때마다 원자력법에 따른 관련 부처의 사전 검토·서류 미비 사항 보완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개발 제한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고리 원전 인근 3개 읍·면에 대해 그린벨트를 해제해 달라는 것이다. 고리 원전이 들어서 있는 기장군 일광면·장안읍 등은 원전이 들어서 있는 지역 중에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그동안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가 크게 제한받아 왔다. 기장군으로서는 국내 최초의 증기 발생기 교체 공사를 지렛대로 삼아 이 일대 3만5천여 주민의 숙원인 재산권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욕심을 가져 볼 만하다.

고리 원자력본부 박동철 과장은 “그린벨트 지정에 한전이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만 한전이 나서서 그린벨트를 해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안은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한전측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지역 김운환 의원을 만나 중재를 요청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여 왔으나 별 성과가 없다.
오규석 기장군수의 입장은 매우 완강하다. 오군수는 “그린벨트를 설정한 취지나 목적과는 관계없이 원전 안전이라는 명분으로 그린벨트를 지정해 주민들 사이에 원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다. 한전측이 행정 소송을 제기하면 법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해, 앞으로도 개축 허가를 내주지 않을 방침임을 분명히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전이 행정 소송을 벌여 기장군으로부터 개축 허가를 얻어낸다 하더라도 증기 발생기 교체 공사 일정을 감안하면 소송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데 있다.

한전은 애초 97년 5월부터 98년 3월까지 저장고 개축 공사를 마치고 98년 6월부터 증기 발생기 교체 공사를 시작한다는 일정을 잡아 놓았지만, 개축 공사 착수 예정일에서 7개월이 지나도록 삽질 한 번 못하고 있다. 개축 공사 허가 문제를 놓고 기장군측과 1년 넘게 지루한 싸움을 벌여온 셈이다.

그렇다고 증기 발생기 교체 공사를 늦출 수도 없다. 증기 발생기 공사는 통상 1년에서 1년반마다 한 번씩 원전 가동을 중단한 채 실시하는 예방 정비 기간에 할 수밖에 없다. 오는 6월로 공사 착수 시점을 잡은 것도 이 예방 정비 기간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또 한전은 이미 고리 원전의 여건상 별도 부지를 확보해 구형 증기 발생기를 보관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전 “더 협상할 시간 여유 없다”

오는 6월6일로 가동 중단 일정을 잡아 놓은 상태에서 한전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아 보인다. 통상적으로 원전 가동을 중단한 뒤 약 20일이 지나면 공사를 시작하게 된다. 이미 지난해 한전 고리본부는 기장군측의 거듭된 공사 불허로 인해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방사능에 오염된 증기 발생기의 오염을 제거한 뒤 야외에 임시 보관하는 방안을 본사에 보고한 바 있다. 그러나 한전은 논란 끝에 안전성 미흡과 여론 등을 고려해 이를 배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전 원자력발전처 고리1호기 설비개선팀 하태근 부장은 “더 이상 협상할 시간 여유가 없다. 늦어도 2월 중으로는 구형 증기 발생기를 어디에다 보관할지 결정하겠다”라고 밝혔다.

문제는 남은 시간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고리 현장에서는 이 공사를 수주한 미국 건설업체 벡텔·현대건설·원자력환경기술원 기술진이 3개월 가까이 소요되는 공사 기간에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안전 사고 따위에 대비해 수 차례 도상 연습까지 하는 등 공사 착수 준비에 여념이 없다.

공사 비용 9백억원이 넘는 거대한 공사가 시공 기술이나 안전 문제 때문이 아니라 국책 사업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이해 부족과 한전측의 늑장 대응으로 인해 표류할 위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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