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운동 '분노의 역류'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8.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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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단체들, ‘제2 건국 운동’에 불만 분출…‘개혁 바로잡기’ 연대 시동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폭탄 선언이었다. 적어도 시민 운동 단체에는 그랬다. ‘제2의 건국 운동’이라 이름 붙인 총체적인 국정 개혁을 주도하기 위해, 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이른바 ‘국민 운동 네트워크’를 결성하겠다는 경축사 내용 때문에 시민 단체들은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웠다. ‘관변 단체 다루듯 시민 운동을 동원해 보겠다는 발상이 아니냐’는 성명서가 곳곳에서 쏟아졌다.

그로부터 한 달이 흘렀다. 그 사이 시민 운동 진영에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지난 9월5일 한국시민단체협의회(시민협)는 특별 회의를 소집했다. 시민협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등 56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시민 운동 연합체이다.

이 날 참석자들은 세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제2 건국 운동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청와대 안에 개혁 전담 팀을 꾸릴 것 △개혁의 청사진을 명확하게 밝힐 것 △운동의 중심 세력은 개혁 의지가 뚜렷한 사람들로 채울 것이 그것이었다. 단 제2 건국 운동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 여부는 시민협 전체가 아닌 개별 단체 차원에서 결정한다는 것이 이 날 회의의 결론이었다.

이같은 결의 내용과는 영 딴판으로 흘러가는 분위기가 감지된 것은 그 직후였다. 9월18일 숭실대 사회교육관에는 12개 시민 단체의 대표·실무자가 모였다. 대부분 시민협에 속한 단체들이지만 시민협과는 관계가 없는 모임이었다. 이 자리에는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탄생한 시민 단체 가운데 이른바 ‘빅4’로 통하는 경실련·여성단체연합·참여연대·환경운동연합 가운데 경실련을 제외한 세 단체가 모두 참석했다. 이들은 시민협의 결정과 달리 현재 상황이 개별 단체 차원에서 대응할 수준이 아니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심각할 정도로 비틀대고 있다는 것이 이 날 모인 단체들의 기본 시각이었다. 따라서 시민 단체는 개혁 부진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조직화하는 데 주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 공동의 네트워크를 구성해 보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제2 건국 운동에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공식 선언하기도 했다.
이들의 움직임은, 1차적으로 시민 운동 진영에 새로운 지각 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94년 시민협이 탄생한 것은 시민 운동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당시 시민협은 ‘문민 정부의 개혁이 주춤거리는 시점에서’ 시민 참여를 극대화해 사회 개혁을 앞당기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천명했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들어 또다시 유력 시민 단체들이 좌초할 위기에 처한 개혁을 되살리겠다며 공동 전선을 펼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환경운동연합의 한 실무자는 ‘진보에서 보수까지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한 단체들이 공존하는 시민협으로는 한계를 느낀다’고 개혁 기구를 따로 구상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이 기구는 앞으로 국회의원 정원 축소를 위한 입법 청원, 재벌 총수 재산 환수 소송 같은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이에 대해 시민협 서경석 사무총장은, 이런 움직임이 시민협의 존재를 위협하기보다는 오히려 경쟁에 의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다양한 목소리와 경쟁이 보장될 때 시민 운동 또한 성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시민 운동 진영에 이같은 갈등을 초래한 근본 원인이 현정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제2 건국 운동은 표면적인 계기일 따름이다. 시민협이나, 따로 개혁 기구를 만들겠다는 단체들이나 한목소리를 내는 지점이 있다. ‘지금 같은 개혁으로는 안된다’는 비판과 ‘개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위기 의식이 그것이다.

“개혁 대상이 개혁 주체가 되다니…”

서경석 사무총장은 ‘빠르면 올 겨울, 늦어도 내년 봄이 개혁을 시도할 마지노 선’이라고 강조했다. 내각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면 개혁 논의가 물 건너갈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은 여권 내부에서조차 나오고 있다. 단, 개혁이 위기에 처한 현재 국면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놓고 시민 단체 사이에 입장이 갈리고 있는 것이다.

시민 단체가 이른바 ‘DJ식 개혁’에 문제를 제기한 시점은 취임 초기로 거슬러올라간다. ‘김대중 정부와 시민 운동의 밀월은 사실상 2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고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은 말한다. 곧 김대통령이 당선자였던 시절에만 그의 정책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을 뿐 취임 이후 잇단 인사 파행, 정부·기업 구조 조정 실패, 표적 사정 따위로 실망감이 점차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경실련의 하승창 정책실장 또한 ‘이제부터라도 DJ와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내부에서 속속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시민 단체들은 혹독한 비판을 비교적 자제해 왔다. 여기에는 김대통령에 대한 시민 단체의 오랜 신뢰도 작용했다. 김대통령은 당선 이전부터 ‘시민 참여를 통한 개혁’을 강조했고, 민간운동지원법(가칭)을 만들어 민간 운동을 활성화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해 왔다. 당선 이후에는 김태동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 같은 시민 단체 출신들을 대거 중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 단체의 신뢰는 곧 무너지기 시작했다. 김대통령이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처럼 지원을 대폭 축소하기로 공약했던 옛 관변 단체들을 유지·인수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이들의 불만은 증폭되었다. 지난 6월 ‘김대중 정부 100일 토론회’에서 지은희 여성단체연합 대표는 현정권이 ‘없앤다던 관변 단체는 유지·인수하고, 자기들 정책에 호응하는 시민 단체는 新 관변 단체로 끌어들이려 하고, 비판적인 단체는 무시하거나 고립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난 9월19일 ‘비판사회학 대회’ 시민단체 집담회에 참석한 환경운동연합 최 열 사무총장 또한 현정부가 비판적인 단체에 불이익을 주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최근 몇몇 언론사가 자신의 금품 수수 의혹을 동시에 취재하고 나섰는데, 정보를 건넨 배후가 여권이라는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최총장은 김대중 정부가 보수 기득권 세력까지 포용한 결과, 개혁의 ‘대상’인 집단이 개혁의 ‘주체’로 둔갑해 구태를 재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제2 건국 운동 구상은 이렇게 쌓여 가던 시민 단체들의 불만에 불을 지른 셈이 되었다. 지난 9월20일 청와대는 ‘제2 건국 범국민 추진위원회’라는 이름 아래 공동위원장 17명과 정부 기획단 명단을 확정 발표했다(왼쪽 표 참조). 10월 초에는 재계·언론계·학계를 아우르는 시민·직능 단체 대표 2백여 명을 선정해 추진위원을 구성하고,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국민운동본부(가칭)를 단계적으로 설치해 대대적인 민·관 합작 운동을 벌여 가겠다는 것이 청와대측 구상이다.

제2 건국 운동 기획에 깊숙이 간여한 대통령 정책기획자문위원회의 한 교수는 이 운동이 단순히 새마을 운동식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미 ‘위로부터의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김영삼 정부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이 그의 전제이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보수 기득권 세력에 대항해 개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민주 시민 세력을 광범위한 동맹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반드시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시민 단체들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고 돈이나 지원해 달라’는 식의 집단 이기주의를 버리고 발상을 대전환해 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날 발표한 공동위원장 명단이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켰다는 것이 시민 단체들의 주장이다. ‘그들(DJ 지지자)만의 잔치’‘어설픈 좌우 합작’‘YS 당시 세계화추진위원회만도 못한 보수적 인선’ 따위가 이들의 비판이다.

제2 건국 운동은 10월2일 제2 건국 범국민 추진위원회 발족을 목표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정부측이 주장하는 대로 ‘21세기 국운(國運)을 좌우하게 될 운동’이 될지, 시민 단체들이 비판하는 대로 ‘배태 과정에서부터 실패를 예고한 운동’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코앞에 놓고 김대중 정부와 시민 운동이 위태롭게 마주서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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