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 폭파’ 숨은 진실 추적하는 사람들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7.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는 김현희·안기부 스토커”
지난 7월8일 국회 정문 앞. 1인 시위 명당답게, 교사 임용 요구나 건설사 비리 고발 등 다양한 시위가 벌어졌다. 오전 11시30분, 한현숙씨(49)도 1인 시위에 나섰다. 한씨는 1987년 11월29일 남편 김정수씨(당시 36세)를 잃었다. 삼성종합건설 직원으로 중동 일꾼이었던 남편은 대한항공(KAL) 858편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1987년 11월29일, 김씨를 비롯한 1백15명을 태운 KAL 858기가 사라졌다. 12월15일 미모의 테러범이 한국에 압송되었다. 13대 대통령 선거 하루 전날이었다. 1988년 1월15일 안기부는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88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민간 항공기를 폭파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씨는 정부 발표를 철석같이 믿었다. 반공 집회에 앞장서 ‘때려잡자 김일성’을 외쳤다. 비행기가 떨어졌다는 안다 만 해역까지 가서 국화꽃을 던졌다. 그런 그녀가 실종자 가족이라며 의미를 달리한 것은, 허점투성이 안기부 발표 때문이다.

그동안 안기부 수사 결과를 놓고 의혹은 끊이지 않았다. 국정원은 ‘무시 모드’로 일관했다. 7월4일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가 재조사 가능성을 언급했다. 의문사법을 개정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재조사하게 하자는 천대표 발언은 국정원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어느 때보다 재조사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17년 동안 의혹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이어진 데는 숨은 주역이 있다. 직접 당사자인 실종자 가족도 아니면서, 우연히 사건을 접하고 진실을 좇는 아마추어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오직 열정 하나로 사건에 매달렸다.

1인 시위를 하는 한현숙씨를 카메라에 담는 신동진씨(38)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신씨는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해피닥스라는 프로덕션 대표다. <동강 내셔널 프로젝트 1년의 기록> <잊혀진 지도자 몽양 여운형> 등을 제작했다.

2001년 신씨는 실종자 가족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KAL기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 그전까지는 ‘예쁜 김현희’ 외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 1987년 사건 당시 그는 군에서 박박 기는 ‘쫄다구’였다. 복학 후에도 전공(서울대 철학과 86학번)보다 다큐에 미친 학생이었다.

2001년 KAL기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면서 신씨는 본격적인 진실 찾기에 나섰다. 1987년 당시 신문 기사를 꼼꼼하게 조사했고, KAL기 사건과 관련된 집회나 토론회는 무조건 쫓아다니며 촬영했다. 그동안 찍은 비디오 테이프만 54개에 달한다. 찍고, 뒤지고, 쫓는 사이 신씨는 ‘김현희 스토커’가 되었다. 신씨가 내린 결론은, 김현희씨의 잦은 말 바꾸기는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면 파고들 수밖에 없다. 그만큼 김현희나 안기부는 허술했다.”

지난 3월 신씨는 결단을 내렸다. KAL 858기 가족회 및 시민대책위원회 사무국장 직을 자청해서 맡았다. 지난 7월1일, 3년 동안 발로 뛰며 쫓은 진실과 거짓을 로 묶었다. 신씨는 이 책에서 김현희와 김승일이 이중 간첩일 수 있다는 의혹까지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신씨는 “추론 가능한 의혹이다. 재조사해서 그 결과 북한의 테러라고 결론 나면 승복하겠다”라고 말했다.

김현희의 실체를 놓고는 말이 많았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라는 A4용지 60장 분량의 팜플렛까지 돌았다. 스물두 가지 의혹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팜플렛은 1989년 1월 <의혹 속의 KAL기 사건>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국내에서 출간된 KAL기 사건에 대한 첫 ‘바이블’이었다. 팜플렛 제작과 출판은 고려대 학생운동 조직인 반미청년회가 주도했다. 반미청년회는 안희정씨(고려대 83학번)가 활동한 단체다. 당시 반미청년회 선전국장 김태원씨(고려대 법학과 83학번)가 팜플렛을 제작 배포한 주인공이다. “고려대가 학생운동의 메카였는데, 총학생회실로 조총련계 자료가 배달되었다”라고 김씨는 회상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김씨가 따로 글을 썼다. 수배 중이었던 김씨는 자료 일체를 도서출판 힘에 넘겼다.

책이 나오자 안기부는 출판사 대표 김연인씨(홍익대 81학번)를 연행했다. 김태원씨도 연행해 사흘 동안 조사했다. 김씨는 단순 전달자라고 주장해 형사 처벌을 면했지만, 김연인씨는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상하게도 기소 때 정작 이 책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북한의 전위 조직인 ‘구국의 소리’ 문건까지 담았던 이 책 대신, 다른 책을 문제 삼은 것이다. 김씨는 1년 가까이 징역을 살았고, 출판사는 문을 닫았다.
KAL기 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의혹을 제기했던 김태원씨는 “학생 때도 그랬지만, 결론을 내리고 의혹을 제기한 것은 아니다. 17년이나 지났지만 의혹이 가시지 않는 만큼 재조사는 꼭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현재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1988년 1월15일 안기부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 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김현희 자신도 인정한 1972년 남북 협상 때 꽃다발을 전달하는 사진이다. 당시 이 사진은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 틀림없다는 증거였다.

당시 감사원 주사였던 현준희씨(51)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귀는 지문인데, 귀 모양이 틀리다.” 현씨는 1991년부터 2년 동안 일본 쓰쿠바 대학원으로 연수를 가서, KAL기 사건을 추적했다. 감사원 일과는 무관한데도 그는 푹 빠져들었다.

2001년, 그때까지 혼자 추적했던 보따리를 풀었다. 현씨는 한 월간지에 자료를 건네며 불씨를 당겼다. 뒤늦게 자료를 공개한 그는 “솔직히 무서웠다. 천동설이 진리일 때 지동설을 주장하면 미친놈 소리 듣는다”라고 말했다. 현씨의 추적은 지금도 계속된다. 그는 김현희를 불러 청문회를 열면, 의혹은 해결된다고 말한다.

그동안 의혹을 둘러싼 유족들과 국정원 간의 ‘국지전’을 시민·사회 단체와 국정원 간의 ‘전면전’으로 바꾼 데는 서현우씨(42) 역할이 컸다. 지난해 서씨는 소설 <배후>를 출간했다. 안기부 자작설을 줄거리로 삼은 이 소설이 출간되자 공방은 전면전으로 바뀌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움직였고, KBS 등 방송사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동의대 82학번인 서씨는 386세대이지만 6월항쟁에 직접 뛰어들지 못했다. 감방에서 맞은 것이다. 6·29선언으로 석방되었고, 대선 투쟁을 하다 KAL기 사건을 접했다. 그때부터 품은 의문을 토해내기 시작한 것은 수지 김 사건 이후부터다. 안기부까지 공모해 살인 사건을 공안 사건으로 둔갑시킨 수지 김 사건을 접한 뒤 서씨는 <배후>를 집필했다. 현재 그는 시민대책위원회 조사팀장을 맡고 있다.

비록 소설이지만 주제가 민감해 출판이 쉽지 않았다. 서씨는 창해출판사 전형배 사장(45)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 했다. 전형배씨는 출판에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역시 진실 찾기에 뛰어들었다. 늦게 품은 의혹이 더 매서웠다.

지난 1월 전씨는 20여 일을 사무실에서 먹고 잤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노다 미네오(59)가 쓴 <파괴공작>을 직접 번역한 것이다. 노다 미네오는 일본인 특유의 오타쿠(마니아) 정신으로 똘똘 뭉친 프리랜서 기자다. 사건 당시 김현희가 이동한 부다페스트·베오그라드 등을 현지 취재해 허술한 김현희의 진술을 파고들었다. 그는 1990년에 일본에서 <파괴공작>을 출간했다.

수사를 맡았던 국정원 요원들이 <배후>에 대해 5억원 손해배상을 청구하자 ‘오기’도 생겼다. 자기가 직접 번역한 <김현희의 파괴공작>도 국정원 수사관들로부터 10억원 소송을 당했다.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7월1일 가족회 사무국장인 신동진씨가 쓴 도 펴냈다. KAL기 사건에 대해 연달아 세 권을 낸 것이다. 전씨는 “한 권이 팔리더라도 세상을 바꿀 만한 의미 있는 책을 내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KAL기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최근 출판전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현희 변론을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64)는 의혹 제기에 대한 답변서 격인 <나는 김현희의 실체를 보았다>를 출간했다. 안변호사는 “곁가지 의혹은 있을 수 있지만, 김현희는 틀림없는 북한 공작원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집필을 시작한 계기는 소설 <배후>였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국선 변호사로서 우연히 김현희 변론을 맡은 그도 처음에는 의혹이 많았다. 안변호사가 변론에 임하기 전에 읽은 책이 바로 대학가에서 퍼졌던 <의혹 속의 KAL기 사건>이다. 희귀본인 그 책을 안변호사는 지금도 소장하고 있었다. 안변호사는 밑줄까지 그어 가며 그 책을 읽고 김현희를 만났다. 김씨와 독대하고 변론하는 과정에서 안변호사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기자였던 부친을 닮아서인지, 안변호사는 당시 김씨와 나눈 대화를 전부 기록했다. KAL기 사건에 대해 나름으로 취재도 계속해 왔다. 1990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법률가대회에 참석한 북한 옵저버로부터 안변호사는 “마유미(김현희) 사건은 민족 문제이니 언급하지 말자”라는 말을 들었다. 북한 대표가 사실상 KAL기 사건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로 그는 받아들였다(안변호사는 지금도 북한 대표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안변호사는 대법원 판결까지 난 사건을 다시 의문사위원회가 재조사하는 것은 반대한다. 다만 그도 제기된 의혹은 어떤 식으로든 정부가 나서서 풀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7월8일 고영구 국정원장은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KAL기 사건은 재조사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같은 시각, 국회 앞에서는 KAL기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한현숙씨가 1인 시위를 계속했다. 장마 전선 탓인지 하늘이 꾸물꾸물하더니,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씨는 꿈쩍도 안했다. ‘KAL 858기 진상을 규명하라’는 글씨만 비에 젖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