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이상향’ 남아공 국제환경학교를 가다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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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국제환경학교’ 현장 취재 / 자연과 각국 문화 ‘놀이하듯’ 배워
“자, 마술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덤불숲을 헤쳐 가던 환경 전문가 수젯이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들고 천천히 침을 발랐다. 가느다란 줄기가 마치 똬리를 틀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 식물(Spear grass)은 비가 오면 자기 몸에서 떨어진 씨앗이 잘 묻히도록 줄기로 땅을 파고 들어간다. 건조한 기후에서 잘 번식하기 위한 생존 본능이다.” 강사의 설명이 이어지자 뒤따르던 학생들은 너도나도 침을 발라가며 줄기의 움직임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길 옆에서 동물 배설물을 한 무더기발견한 그녀는 스스럼없이 배설물을 집어들더니 학생들 코앞으로 내밀었다. “냄새를 맡아보라” “반으로 갈라 내용물이 무엇인지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움찔하며 눈치를 살피던 학생들은 하나 둘 배설물을 받아들더니 이리저리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강사는 배설물의 크기·모양·냄새를 하나하나 설명한 후, 하나는 얼룩말, 다른 하나는 임팔라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아프리카 초원 한가운데서 느닷없이 스테이크·햄버거·핫도그 얘기도 나왔다. 강사 요한은 나뭇잎 세 종류를 손에 들더니 동물들이 가장 잘 먹는 순서대로 스테이크(Red grass), 햄버거(Eragrostis), 핫도그(Terpentine)에 비유하는가 하면, “부시(bush:관목숲) 슈퍼마켓에 가면 칫솔도 있다”라면서 한 나뭇가지(Gwarie) 끝을 칫솔모처럼 만들어 이 닦는 시늉을 했다. 네 시간 넘게 초원을 누비는 동안 강사들은 참가 학생들이 야생 동식물 세계에 자연스레 빠져들도록 끊임없이 흥밋거리를 만들어냈다. 지난 7월 말 남아프리카공화국 한 환경학교에서의 일이다.

비영리 환경단체인 ‘우붕가니’(Ubungani: 아프리카어로 ‘우정’이라는 뜻)가 주관하고, 캐세이퍼시픽 항공이 후원하는 이 국제환경학교는 올해로 10년째를 맞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생태체험 프로그램(International Wilderness Experience Program)이다. 홍콩에 본사를 둔 캐세이퍼시픽 항공은 매년 봄 전세계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환경에 관한 영어 에세이를 쓰게 하고 인터뷰를 한 후, 상위 입상자에게 아프리카 대자연에서 야생 체험을 할 기회를 제공한다. 올해는 한국 대표 3명을 포함해 16개국에서 모두 52명이 선발되었다.

7월21일부터 열흘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엔타베니 생태보존지구에서 열린 이 환경 학교의 프로그램은 크게 두 주제로 나뉜다. 하나는 자연과 친숙해지면서 자연스레 환경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초원을 누비는 것말고도, 계곡물 수질 분석, 생태계 먹이사슬 연구, 사자·악어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사파리 체험, 밤하늘 별 보기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놀이하듯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화학약품이나 과학기구 같은 문명의 이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한 예로 엔타베니 계곡의 수질이 얼마나 오염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학생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계곡에 사는 곤충을 최대한 채집하는 일이다. 그 다음 채집된 곤충이 어떤 종류이고, 이들이 1급수 이상 맑은 물에 사는지, 아니면 2급수·3급수에서도 살 수 있는지를 분류한다. 그 결과를 토대로 ‘엔타베니 계곡에서는 가장 깨끗한 물에서만 사는 플라나리아(Planaria)가 발견되었으므로 이 물은 1급수다’라고 답을 찾아내는 식이다.

때로는 ‘롤 플레잉’을 통해 환경 문제를 토론하기도 한다. 올해는 ‘아프리카 생태보존지구 안에 카지노 건설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주제였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이미 첨예한 이슈로 떠오른 ‘개발이냐, 보전이냐’를 놓고 학생 때부터 일찌감치 논리적 사고를 하도록 이끄는 프로그램이다.

‘모의 공청회’에서 개발업자와 빈민촌 대표로 나선 학생들은 ‘일자리가 늘어난다’ ‘세금 수입이 늘어 여러 모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카지노 건설에 찬성한 반면, 환경단체와 부자 동네 대표로 나선 학생들은 ‘환경이 파괴된다’ ‘범죄의 온상이 된다’는 논리로 반박했다. 환경단체 대표 역을 맡은 필리핀 출신 게일은 “자녀 교육비를 벌기 위해 아이들 교육에 치명적인 카지노를 유치하자는 발상은 잘못이다. 가난한 동네 주민은 개발업자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놀아나서는 안된다”라고 열변을 토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환경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것과 동시에 참가자들이 서로 다른 문화를 체험하고 공존의 지혜를 터득하게 만드는 것도 이 환경 학교의 주된 목표다.

참가 학생들은 우선 자기 나라를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자료를 준비해와 틈틈이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처음에는 위치·인구·종교·관광지 같은 기본 사항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만, 참가자들끼리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다 보면 빈부 격차와 식민지 경험, 민족 갈등 같은 민감한 대목도 스스럼없이 건드리게 된다.

참가 학생들은 또 최소한 한 끼는 반드시 자기 나라 고유 음식을 만들어 다른 나라 학생들을 ‘접대’해야 한다. 음식을 통해 문화를 알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한국 대표팀이 준비한 메뉴는 한국 쌀로 만든 밥과 불고기, 잡채, 김치. 기본 재료와 김치는 주최측에 미리 주문한 후 현장에서는 다듬고 간을 내고 볶는 과정을 소개했다. 실수로 당면을 빼먹는 바람에 ‘잡채’가 졸지에 ‘야채볶음’으로 돌변하기도 했지만, 평소 부엌 근처에도 갈 기회가 없었다는 한국 학생들은 주방을 점령한 지 3시간 만에 그럴듯한 만찬을 내놓았다. 특히 60인분 밥을 큼지막한 솥 하나에 지어낸 한현민은 ‘밥물의 양은 손을 담가 조절한다’ ‘밥솥의 압력을 높이기 위해 뚜껑 위에 큼지막한 돌을 얹는다’는 밥짓기 비법을 공개해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각국 대표들이 가장 신경을 쓰는 프로그램은 전통 혼례식과 문화 공연이다. 단순히 식 자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의상에서부터 절차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꼼꼼하게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대표들은 홍콩 대표의 얼굴에 오징어 탈을 씌우고 함진아비로 기용하는 등 다른 나라 학생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화려한 전통 혼례식을 선보였다.

하객들이 춤추는 신랑 신부의 옷에 축의금을 달아주는 필리핀의 결혼식, 신부 어머니가 딸에게 ‘남편이 늦게 들어오더라도 절대 꼬치꼬치 따지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결혼 풍습 등을 보며 신기해하던 학생들은 ‘베트남에서는 신랑이 지참금을 준비해야 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그 반대다’라는 설명이 이어지자, 순식간에 여학생·남학생이 편을 갈라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우붕가니 프로그램의 총지휘자인 하네카는 “참가자들이 자연과 교감하고 서로 문화를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목표다”라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간 학생들이 더 넓은 시야를 가진 여론주도층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며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우붕가니(www.ubungani.or.za)는 이 환경 학교 외에도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크고 작은 규모의 환경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유네스코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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