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심사평가원 기능 약하고 인력 부족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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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 약하고 인력 부족한 '심평원', 부당·과당 청구 막을 길 없어

의료 보험 재정 파탄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가닥을 잡고 있다. 민주당 '건강보험 재정 건전화 기획단'과 복지부가 마련한 대책안은 수입 증대보다 지출 억제 방안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사진설명 막강 의료계, 약체 심평원 : 의·약계의 부당 청구를 적발하는 심평원은 설립 때부터 의료계의 입김에 휘둘렸다. ⓒ시사저널 안희태

실제로 지난 3월13일 복지부는 담합에 의한 부당 청구·불법 조제·허위 청구로 적발된 9개 요양기관을 형사 고발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인천광역시 ㅇ의원은 지난해 12월까지 같은 건물에 위치한 ㄱ·ㅈ 약국과 담합해 사용하지 않은 주사제에 대한 원외 처방전을 발행해 2천만원을 부당하게 챙겼다. 서울 영등포구 ㅍ약국도 ㅍ의원과 담합해 건강보험공단(공단)에 청구한 7천2건 가운데 7천1건을 허위 청구해서 1억2천5백만원을 가로챘다. 당·정은 이번에 적발된 9개 기관은 빙산의 일각이라며, 만연한 부당·과다 청구를 막기 위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는 대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당·정의 대책안은 뒷북 정책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되었다. 심평원의 기능을 제약하고 축소한 장본인이 다름 아니라 의료계에 휘둘린 정부이기 때문이다.

심평원은 병원이나 의원·약국 등 요양기관이 공단에 매달 청구하는 비용이 적절한지 평가하는 심사 평가 전문 기관인데, 지난해 7월1일 독립 기구로 출범했다. 이전에는 의료보험연합회 산하 기구가 심사를 맡아 오다, 1998년 3월부터 의료보험통합추진기획단(추진단) 내에서 논란을 거듭한 끝에 심사 전문 기관을 독립 기구로 만들자고 결정했다. 당시 심평원의 위상을 놓고 의료계와 시민단체 사이에 의견이 엇갈렸다. 의료계는 공단으로부터 진료비 심사 기구가 완전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시민단체는 공단의 산하 기구로 심사 기구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복지부는 의료계의 주장을 수용해 독립 기구로 만들었다.

의료계가 심평원 독립을 주장한 이유는 간단하다. 심사 기구가 의료보험이 시행된 23년 동안 보험자 단체(의료보험조합)에 속해 있으면서 전문성이 결여된 평가를 해왔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결여된 채 청구된 보험료를 무조건 삭감했다는 반감이 크게 작용했다. 반면 시민단체는 진료비 심사가 보험자의 고유 권한인 만큼 공단이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직접 보험료를 관리하는 당사자가 아닌 3자가 심사하게 되면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시민단체의 이같은 우려는 적중했다. 지난 1월과 2월 심평원은 병원과 의원 등 요양기관이 청구한 진료비 가운데 0.8%만을 삭감했다. 청구된 진료비 중 99.2%를 한푼도 깎지 않고 지급했다. 한 해 예산 9백억원을 집행하는 심평원이 13조 규모로 청구되는 금액 가운데 고작 천억원 남짓만 삭감한 것이다. 굳이 미국(10%)이나 타이완(13.2%)의 삭감률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낮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심평원은 현재 9실 7지원 48부이며, 직원 수는 총1천1백58명이다. 대부분 간호학과 출신인 심사 직원 3백50여 명이 청구내역서를 1차 심사하고 의사·치과의사·한의사·약사로 구성된 심사위원이 2차 심사를 맡는다. 만일 심사 직원에 의해 심사가 끝나지 않으면 상근 심사위원 23명과 비상근 심사위원 5백18명이 심사를 맡는다. 상근 심사위원 23명은 모두 의·약사인데 17명을 공채했고, 6명은 공단과 의·약 단체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요양기관 한 차례씩 실사하는 데 177년 걸려


서류 심사원 3백50여 명은 지난해 하루 처리 건수 목표를 3천9백28건으로 잡았다. 심평원은 올해 인력을 충원해 하루 7천건을 처리할 계획이다. 이처럼 목표치를 높게 잡은 것은 의약 분업 이후 심사 청구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약국 약제비 청구만 보더라도, 의약 분업 전인 지난해 상반기 월 평균은 6천6백55건이었는데, 의약 분업 이후에는 1만9천8백24건으로 198%나 늘어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난해에는 2백57개 기관을 현지 실사하는 데 그쳤다.

서류 심사를 통해 문제점이 드러난 곳은 복지부 직원 1명과 심평원 직원 2∼3명이 팀을 이루어 현지 확인 실사를 한다. 현지 심사직원 90명으로 요양기관 6만여 개를 제대로 점검하기는 불가능하다. 5백개 기관이 한 해 동안 실사를 받는다고 치면 전체 요양기관이 한 차례씩 실사를 받는 데 1백77년이 걸린다.

시민단체는 이처럼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심평원의 일부 기능을 공단으로 넘기라고 주장한다. 조경애 건강연대 사무국장은 "내부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공단이 심사 기능 가운데 일부를 맡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주장했다. 김기식 참여연대 정책실장도 "시민단체의 주장은 심평원 설립 때와 마찬가지다. 심평원은 지금과 같은 시스템으로는 의료계의 입김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시민단체가 심평원에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는 이유는 심평원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현재 심평원장은 김대통령의 친인척이자 전직 의사인 서재희씨(72)가 맡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고문을 지내고 대한의사협회와 병원협회의 추천으로 원장에 오른 서씨가 제목소리를 내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시민단체의 주장이다.

서원장은 또한 11년 동안이나 아들의 피부양자로 올라 보험료를 한푼도 내지 않았고, 원장으로 내정되기 직전까지 자기가 운영했던 '서재희 의원'이 의료보험 연합체로부터 부당 과잉 청구 가능성이 높은 '정밀 심사 기관'으로 분류되어 원장 자질까지 의심받았다. 서씨는 지난해 6월20∼22일 의료계 폐업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런 서원장이 버티고 있는 심평원이 구멍 뚫린 보험금고를 제대로 감시할 수 있을지 논란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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