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 비리 저질러도 안진은 '안전'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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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 분식 참여 회계법인 중 유일하게 기소 면해…
"여권 인사 관련" 추측 나돌아


대우그룹 회계 비리 특별감리 조처는 회계법인에는 악몽이었다. 업계 '빅5'이던 산동·안진·안건 회계법인이 줄줄이 고발되어, 산동회계법인은 금융감독원으로부터 12개월 영업 정지를 당했다. 비록 '설립인가 취소'라는 최고 수위의 징계는 피했지만, 산동은 자진해서 간판을 내리고 소속 회계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또 금감원은 산동·안진·안건의 이사급 공인회계사 4명을 고발하고 7명을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그 중 1명이 구속되었고 6명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공인회계사가 구속 기소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또 회계사 22명이 재경부로부터 등록 취소나 직무 정지 같은 중징계를 받았다. 그동안 "금융감독원 감리에서 적발될 확률은 길을 걷다가 차에 치일 확률과 같다"라며 여유를 부렸던 회계법인들에게 대우 부실 회계 감리 결과는 이처럼 날벼락이었다.


그런데 업계에서는 서릿발 같은 대우 관련 조사로 고발당했던 회계법인 가운데 안진회계법인과 소속 공인회계사가 아무런 법적 제재를 받지 않은 것을 의아해 하고 있다. 산동과 안건의 담당 회계사들이 검찰에 기소되어 현재 형사 재판을 받고 있는 것에 비해 이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아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불만이 회계사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안진의 해명 '궁색', 검찰은 수사 의지 없어




1996년부터 대우전자를 맡아온 안진(옛 세동)은 대우그룹이 부실을 감추고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분식 회계를 하던 1998년과 1999년에 대우전자와 경남기업 감사보고서를 작성했다. 당시 안진은 어음 차입금을 누락하고 채권 금액을 부풀리는 등 전형적인 수법으로 3조7천억원을 불려 주었다. 물론 14조6천억원을 분식한 (주)대우를 감사한 산동회계법인에 비하면 안진은 '깃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한보가 6천9백억원, 기아자동차가 3조원을 분식해 국가 경제를 파탄 냈던 점을 감안할 때 안진의 과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안진회계법인은 법인과 소속 회계사가 기소조차 되지 않은 데 대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는 대우·현대·삼성을 감사하고 '한정'으로 판정한 것만 해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검찰이 이를 인정해준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정 판정'이란 회계준칙에 따르지 않아 몇 가지 문제가 있으나 재무제표 전체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어서 3조7천억원 분식에 면죄부를 받을 근거로는 궁색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사건을 조사했던 대검쪽 설명은 안진과 또 다르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대우전자에 파견되어 감사를 진행했던 회계사 최 아무개씨(34)가 미국으로 도피해 다른 사람들 증언만으로는 사실 관계 확인이 어려워 수사를 중지했다. 최씨가 잡히는 대로 수사를 다시 진행할 방침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해외로 도피한 최씨를 기소 중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확인한 결과 도피한 최씨는 기소 중지가 안 되어 있어 얼마든지 입·출국이 가능했다. 또 경찰 수배도 되어 있지 않았다. 반면 대우전자 분식 회계를 총괄 지휘했던 한 아무개 이사(46·현 전무)는 현재 참고인 중지 상태로 있었다. 참고인 중지란 주범이 도피해 다른 참고인 소환 조사가 별 의미가 없는 경우에 내리는 조처다. 또 검찰은 중간 책임자 역할을 했던 김 아무개 이사(43·현 상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금감원은 지난해 9월 대우 특별감리 조사 결과, 책임자였던 한이사를 고발했고 나머지 김이사와 최씨는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었다. 한마디로 한이사가 주범이라는 이야기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이사급 파트너는 감사 업무를 총지휘한다. 따라서 파트너가 부실 회계의 모든 책임을 지는 게 회계업계의 관행이다"라고 말했다. 즉 최씨가 없어도 한이사와 김이사를 조사하면 법인과 회계사를 충분히 기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핵심 용의자인 한씨는 단지 참고인으로 분류하고, 수사를 진행시키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최씨에게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만 놓고 볼 때 검찰이 수사할 의지가 없음이 분명한 셈이다.


전 회장 강운태 의원 "나는 대우 사건과 무관"




금감원 내부에서는 이처럼 1년 동안 공 들여 조사한 사건을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자 '역시'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안진이 처벌받지 않은 것을 두고 금감원과 회계사들 사이에서 수많은 추측이 나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추측의 골자는 현역 여당의원인 강운태 의원(광주 남)이 안진의 전 회장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광주시장 출신인 강의원은 1997년 세동회계법인 회장으로 취임했고, 1999년 세동과 안진이 합병한 이후에 안진 회장 직을 맡아 왔다.


이런 주장에 안진측은 펄쩍 뛴다. 강의원은 선거 후 회장 직에서 물러난 데다 여당 중진도 아닌 관료 출신 초선 의원인데 무슨 힘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강운태 의원도 이에 대해 "회계법인 회장은 주식회사 회장과 다르다. 난 결재 라인에 있던 사람이 아니다. 또 총선 이후 회장 직을 사퇴해서 대우 사건과는 전혀 무관하다"라고 말했다. 한편 업계에서는 대선 때 김대중 총재 특보를 지낸 김 아무개 부회장이 이번 로비의 중심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나 안진은 떠도는 소문일 뿐 사실무근이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업계의 시각은 싸늘하다. 한 회계법인의 고위 간부는 "대우 사건 조사는 정권 차원에서 공을 들인 작품이다. 그런데 안진은 거기서 빠져나왔다. 이렇게 투명하지 않은 처리를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참여연대는 3월21일 금감원이 분식 회계 혐의를 적발하고도 고발하지 않은 기업과 삼일·안건·안진 등 회계법인을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금감원 조사 결과 안진은 대한생명(4천3백94억원)과 고합(2천7백18억원)의 이익을 부풀려 분식 회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분식 회계는 배임·횡령·사기 등을 저지르는 데 쓰이는 기초 자료를 만드는 중대한 범죄다. 해당 기업과 회계법인을 엄하게 다스려 재발을 막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시민단체의 주장과 달리 금감원은 지난 3월30일 과거부터 쌓아온 2조원 손실을 비로소 올해에야 상계한 현대건설에 대해 특별감리를 실시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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