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피해 노인들 아파 울고 억울해 울고…
  • 경남 합천·박병출 부산 주재기자 ()
  • 승인 2001.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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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보상·치료 외면…진료소마저 보건소에 빼앗겨


8월이 올 때마다 악몽에 소스라치는 사람들이 있다. 광복 반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 육신의 상처와 정신적 충격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갇힌 삶'을 이어가고 있는 원폭 피해자들이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은 엄청난 재앙을 불렀다. 1945년 말 일본 내무성 조사에 따르면, 사망자가 28만명, 살아 남기는 했지만 방사능에 노출되어 후유증을 앓는 사람이 26만명에 달한다. 여기에는 징용·징병·취업 등으로 일본에 가 있다가 화를 입은 한국인도 10만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일본 정부는 '원폭 의료 특별조치법'에 따라 피폭자들에게 의료·건강 수당, 개호(介護) 수당 등을 지급해 오다 1995년 다시 '피폭자 원호법'을 제정해 무료 치료와 함께 다달이 3만3천4백30 엔씩 건강관리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혜택을 받은 한국인은 극소수이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4만5천명은 치료조차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고통과 싸우다 죽어 갔다. 그런데도 일본이나 우리 정부는 피해 보상과 치료 대책을 요구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경남 합천군은 피폭자가 유난히 많이 살고 있어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린다. 원폭피해자협회 합천군지부에는 전국 회원의 4분의 1이 넘는 5백46명이 산다. 심진태 합천지부장에 따르면, 정부는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혜택마저 가로채고 있다. 그는 합천에서 한동안 운영되었던 원폭피해자 진료소를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일본측이 1972년 합천읍에 피폭자를 위한 진료소를 지어 의료진까지 파견한 적이 있었다. 몇 년 만에 지원이 끊기자 합천군은 진료소를 보건소로 사용하고 심지어 진료 차량마저 보건소 구급차로 바꾸었다. 보건소를 신축한 후 건물을 탁구장으로 임대해 군청 수입으로 처리하고 피폭자들에게는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고 있다." 진료소 운영에 도움을 받으려고 시설을 군청에 기부 채납한 것이, 오히려 모든 것을 빼앗긴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설명이다.


당시 건물에 붙어 있던 '원폭피해자 진료소' 간판을 신축한 보건소에 옮겨 달았지만, 피폭자도 일반 환자와 똑같이 취급된다. 원폭 투하 때 히로시마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건물이 무너져 허리를 다쳤다는 김 아무개씨(73·합천군 율곡면)는 "보건소 처방전을 들고 이리저리 약국을 찾아다니기도 힘들고, 치료 후에 영수증을 챙겨 몇 푼 안되는 진료비를 청구하기도 번거로워 여간 아파도 누워서 버틴다"라고 말했다. 피폭자에게는 장애자들이 받는 의약 분업 예외 혜택도 적용되지 않는다.


정부, 일본이 내놓은 돈만 곶감 빼먹듯




피폭자들은 의료기관에 낸 진료비 실비와 매달 10만원씩 건강관리비를 지원받을 뿐이다. 사망하면 장례비 1백50만원이 추가 지급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 정부가 내놓는 돈은 한 푼도 들어 있지 않다. 정부는 1989년 일본과 협약을 맺어 피폭자 복지 지원 명목으로 2백60억원(40억 엔)을 받았다. 당시에는 우리 쪽도 같은 규모로 기금을 출연하기로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일본이 내놓은 돈만 적십자사에 맡겨 곶감처럼 조금씩 뽑아 주는 것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1백13억원이 남은 이 돈이 바닥 나는 2003년 이후 대책은 전혀 없다.


국내 유일의 피폭자 복지시설인 원폭피해자 복지회관(합천읍 영창리)도 이 기금 중 24억원을 빼내 지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에 건평 8백 평 규모인데, 대한적십자사가 양로원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1996년 복지회관 건립 때 부지 1천6백여 평을 제공하고 매년 운영비(2000년 기준 약 8억원)를 지원하는 정도가, 우리 정부가 피폭자들을 위해 한 일이다.


복지관은 수용 규모가 80명에 불과해 입주 기회를 얻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건립 초기에는 자녀들의 '얼굴'이 깎일까 봐 나서는 사람이 적었으나 지금은 원폭피해자협회의 입주 심사를 한참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다. 부산에 살다가 1997년 입주한 손귀달 할머니(72)는 "집에서도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지만 진료실과 물리치료실 등 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 모인 곳이어서 아들딸을 설득해 입주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손 할머니는 '왜놈'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그들이 보상이 아니라 시혜를 베풀 듯이 지어 준 집에 사는 것은 분하기 짝이 없다"라고 말했다. 권복순 할머니(76)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는 일본이나, 국민을 대신해 말 한마디 거들어주지 않는 쪽이나 매한가지다"라며 우리 정부를 원망했다.




같은 방을 쓰는 두 할머니는 모두 중풍으로 손발이 마비되었다. 입주자 중 상당수는 피폭 후유증과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이 곳을 찾은 사람들이다. 이 아무개씨(여·61)는 피폭 때 건물 잔해에 묻혔다가 목 아래를 쓰지 못하는 경우다. 평생 온몸 경련과 통증에 시달리며 독신으로 지낸 이씨는 "방바닥을 할퀴며 고통을 견뎌야 할 때는, 흙더미 속에서 나를 구해 준 오빠를 원망하기도 했다"라고 눈물을 훔쳤다.


이씨와 같은 후유 장애가 없더라도 피폭자들은 만성적인 어지럼증과 두통에 시달리고, 나이 들어서는 중풍에 걸리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관찰되었다. 일본에서는 일반인에 비해 백혈병과 암에 걸리는 확률이 높다는 보고도 나왔다. 국내에서는 피폭 후유증에 대한 연구는 둘째치고 정확한 실태 자료조차 없다. 1970년대에 보건사회부가 한 차례 조사에 나선 적은 있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합천군도 1972년과 1978년 기초 조사를 벌여 원폭 피해자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5천명 규모라는 사실만 확인하고 명부를 덮어버렸다.


심진태 합천지부장은 "아직 생존한 합천 지역 피폭자만도 천 명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사람들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라고 말했다. 주위에서 피폭 후유증이 유전될까 봐 결혼을 꺼리는 등 자녀들의 앞길을 막는 결과가 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우리가 죽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




일본 정부는 1980년대 후반부터 국외 거주 피폭자들에게도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급해 무료 진료를 해주고 있다. 치료받기 위해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건강관리수당도 지급한다. 그러나 직접 일본에 가야 하고, 지나치게 심사 규정이 엄격하며, 유효 기간도 매년 갱신하도록 하는 등 절차가 까다로워 원폭협회 회원 가운데 건강수첩을 받은 사람은 10%도 안된다.
한 가지 희망적인 일은, 최근 일본 법원에서 국외 피폭자들에 대한 새로운 판결이 나왔다는 점이다. 지난 6월 일본 오사카 법원은 일본 정부에 '한국인 곽기훈씨(76·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게 매달 3만4천3백30 엔씩 건강관리수당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외국인 피폭자에게도 일본 국민과 같이 치료 기간에 관계없이 건강관리수당을 지급하라며 소송을 낸 곽씨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 정부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곽씨는 고등법원에서도 승소를 자신하고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간다면,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길고 긴 법정 공방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1997년에는 징용 피해자 김순길씨(당시 75세)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가 13차 공판을 끝으로 결말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원폭피해자협회 관계자들은 "복지회관 입주자들만 해도 평균 연령이 78세나 된다. 10년 후면 원폭 피해 1세대는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우리가 죽어서 사태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원폭피해자협회에 가입해 있는 국내 생존자는 2천1백96명에 불과하다. 고령으로 인한 사망자가 매년 20명이 넘고, 그 수는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이다. 정부는 외면하고, 이들은 일본과의 싸움에 앞서 '시간'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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