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용사들 '노점상과의 도로전'
  • 경부·남해 고속도로/박병출 부산 주재기자 ()
  • 승인 2001.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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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 전우회 회원,
용역 받아 고속도로 휴게소 단속…난장판 벌어지고 부상자 속출


어제의 용사들이 고속도로에 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병들이 경부고속도로에서 대대적인 '작전'을 펼친 것이다. 휴게소에는 '야전 사령부'가 들어섰고, '작전 차량' 수십 대가 사이렌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고속도로를 누비고 있다.




충돌 : 고속도로휴게소협의회 요청에 따라 지난 8월20일부터 노점상 집중 단속에 나선 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회원들(오른쪽). 고속도로 노점상과 곳곳에서 충돌해 휴게소마다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왼쪽).


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전우회) 회원들이 지난 8월20일부터 고속도로 노점상 집중 단속에 나서, 휴게소마다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노점상들은 주차장 바닥이나 차량 위에 드러눕는 등 강력히 반발했고, 전우회원 수십 명이 좌판을 때려부수거나 차량을 들어 옮기는 바람에 난장판이 벌어졌다. 시흥·신탄진·안양·언양 등 여러 휴게소에서 병원으로 실려가는 부상자가 속출했다.


도로전을 방불케 한 양측의 충돌은, 연 3일간 계속된 후에야 일단 진정되었다. 전우회가 부산·경남·전북·광주 지부 5백여 회원을 교대로 투입하자, 숫자에서 밀린 노점상들이 어쩔 수 없이 철수한 것이다. 전우회원들은 언제 있을지 모를 노점상들의 반격에 대비해 경계 근무를 계속하고 있다. 부산·경남 지부가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언양 휴게소에, 광주·전북 지부가 하행선 휴게소에 텐트를 치고 회원 수십 명을 배치했다. 이들은 점령군처럼 휴게소 한쪽에 텐트 5∼6동을 설치하고 선글라스에 군복 차림으로 활보하고 있다.


전우회가 느닷없이 노점상 단속에 나선 것은, 고속도로휴게소협회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전국 98개 고속도로휴게소 운영업체 대표들은 잡상인들이 휴게소 이용객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며 지난 3월 임시총회에서 대책을 논의해, 전우회에 '고속도로휴게소 주차장 효율적 관리를 위한 용역'을 맡겼다. 계약 내용은 8월1일부터 2002년 7월 말까지 고속도로 모든 휴게소의 주차장 관리를 전우회에 맡기고 월 1억원(부가세 별도)씩 용역비를 지급한다는 것이다.




부상 : 단속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에 대해 노점상들은 전우회원들이 가스총을 들이대며 폭력을 휘둘렀다고 주장하는 반면, 전우회측은 자작극을 벌여 폭력 누명을 씌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노점상이 적게는 1 ∼2명, 많게는 3∼4명이 영업을 하고 있다. 공구나 차량 액세서리가 주품목이다. 최근에는 차량 유리 세정제, 불법 성인용품을 판매하는 잡상인까지 설치며 구매를 강요하는 등 휴게소 이용객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다.


심지어 신용 카드 가입을 권유하는 젊은 여성들까지 고속도로에 진출했다. 부산에서 울산으로 출퇴근하는 김현택씨(42·회사원)는 "간이 정차장에서 잠시 눈을 붙이다가 누가 차 문을 두드리기에 일어났다. 밤 아홉시가 지난 시각이었는데 30대 여성이 접근해 카드 가입을 권유했다"라고 말했다. 발에 모기장까지 두른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지만, '외진 곳에서 저러다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더라는 것이다.


전우회측은 "조사 결과 휴게소 노점 가운데 90% 이상은 주인이 따로 있다. 조직 폭력배들이 자릿세를 받거나 월급을 주고 장사를 시키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도로공사 관계자도 "심한 경우 한 사람이 10여 개 휴게소의 노점을 소유하고 사장 행세를 한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ㄴ휴게소에서 공구노점을 열고 있는 홍 아무개씨(53)는 사장이 따로 있고 자신은 월급을 받고 일한다고 밝혔다. 장사를 시작한 지 2년째라는 그는 "원래 다른 사람이 있던 자리를 사장이 인수해 나에게 맡겼다"라고 말했다.


용역 계약, 적법성 논란




노점상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우회가 그들을 단속할 권리가 있는가 하는 문제도 논란거리이다. 고속도로에서의 불법 상행위 단속은 경찰, 휴게소 내의 주차장 관리는 도로공사 소관이다. 범칙금 부과나 견인 권한이 없는 고속도로휴게소협회가 다른 민간단체에 용역을 주어 노점상을 강제로 쫓아내는 것 역시 불법 행위라는 지적이다.


노점상들은 정부와 도로공사가 사회적 약자인 노점상을 단속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역사의 피해자'인 전우회를 앞세웠다고 주장한다. 월남전 참전자(1964∼1973년)와 휴전선 비무장지대 근무자(1968∼1969년)를 포함해 전국에서 고엽제 피해자로 등록된 사람은 7만3천여 명에 달한다. 그 중 후유증을 인정받아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는 사람은 전체의 6%에 못미치는 4천2백여 명이다. 후유의증으로 인정받은 4만명은 1998년부터 시행한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월 20만∼40만 원씩 수당을 받고 있다. 나머지 2만여 명은 이런 혜택마저 받지 못하고 있다.


전우회 회원들은 이같이 인색한 정부 지원에 반감을 감추지 않는다. 특히 근래 들어 파월 한국군의 월남전 민간인 학살 주장이 제기된 데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9월23일 천득렁 베트남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월남전 참전에 사과한 데 대해 노우태 전우회 부산지부장(60)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나가 싸운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다"라고 항변했다.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 1997년 창립해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온 전우회 처지에서는 매달 1억원이라는 용역비는 엄청난 액수여서, 계약 내용을 이행하는 데 충실할 수밖에 없다.


도로공사·경찰, 속수무책




용역 계약이 폭력과 적법성 논란을 빚은 데 대해 차봉민 도로공사 시설영업과장은 "초기 단속에 다소 무리가 있었다는 지적에 따라 8월23일부터는 전우회 대신 도로공사가 직접 단속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영업 중인 호남·남해 고속도로 노점상들에게 이미 두세 차례 계고장을 발부했고, 경찰에 고발해 견인 조처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우회에 맡긴 일이 주차장 안내와 청소 등 '소극적 관리'에 국한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설명과 달리 계약서나 도로공사와 휴게소협회, 전우회 등이 주고받은 문서에는 '불법 잡상인 단속' '강제 철거' 등이 명시되어 있어 위법성 논란은 쉽게 수그러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노점 단속에 나선 전우회 회원들은 "용역 계약을 맺은 이상 우리는 도로공사나 고속도로휴게소협회가 아니라 본부(전우회)의 행동지침에 따른다. 지금이라도 노점상이 출현하면 즉시 출동해 퇴거시키겠다"라고 말해 도로공사의 뒤늦은 만류가 먹혀들지 않는 분위기이다.


전국노점상연합회(전노련)도 전열을 정비해, 최근 결성한 고속도로휴게소 지역연합회 차원에서 법적·물리적 대응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홍웅식 전노련 조직2국장은 "폭력 단속으로 부상한 노점상이 15명이나 된다. 도로공사·휴게소협회·전우회를 상대로 곧 법적 대응에 나서고, 9월4일 기자회견을 통해 그들의 폭압성을 알리고 7일에는 전국 규모 집회를 여는 등 정면 대응하겠다"라고 밝혔다. 자칫하면 고속도로 휴게소가 불법 노점상과 무법 단속반의 전쟁터로 변할 전망이다. 도로공사나 경찰은 속수무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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