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으로 속 보인 '언론 대리전'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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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 국제 언론단체, '사주 구속'에 두 소리…
보수 신문, IPI·WAN만 대서특필
언론사 탈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외국 언론단체들이 잇달아 한국을 찾자, 한국 언론들이 자사 입맛대로 이들 단체들의 활동을 보태거나 줄이는 식으로 보도해 독자들을 혼란하게 만들고 있다.




요즘 한국을 방문했거나 방문할 예정인 언론단체는 모두 4개다. 지난 9월4일 세계신문협회(WAN), 5일 국제언론인협회(IPI), 6일 국제기자연맹(IFJ) 대표단이 이미 방한했고, 16일 미국 프리덤하우스 수석 연구원이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이들 가운데 신문 발행인(president) 모임인 WAN과 세계 1백15개국 언론사 고위 인사(주필·편집인)들의 모임인 IPI는 이미 한국 정부의 세무 조사를 언론 탄압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번에 방한한 IPI 요한 프리츠 사무총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세무 조사를 언론 탄압이라고 비판하는 서한을 두 차례나 보내 정부와 한판 설전을 벌였다. 공교롭게도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은 IPI 부회장이고,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WAN 부회장이다.


IFJ "언론개혁 지지" IPI·WAN "언론탄압 반대"


이와 반대로 평기자에게만 회원 자격을 부여하는 IFJ는 지난 6월 서울 총회에서 '언론사도 납세의 의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며 언론 개혁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IFJ는 전세계 1백4개국 기자 45만여명을 거느린 세계 최대의 언론인 모임이다. 이처럼 외국 언론 단체인 IPI와 IFJ는 언론사 세무 조사를 두고 완전히 의견이 갈려 양측 조사단 방한 전부터 '언론사 세무 조사를 두고 국제전·대리전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왔다.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조·중·동)는 '세무 조사=언론 탄압'이라고 말하는 IPI·WAN에 지면을 할애했다. 조선은 IPI측이 방한하는 날부터 관련 기사를 꾸준히 1면과 3면에 올렸다.


그런데 IPI·WBN 공동 조사단은 방한 내내 돌출 행동을 했다. 공동조사단은 원래 9월5∼7일 공동으로 수감된 언론 사주를 면회하고 여야 의원, 언론계 인사, 시민단체를 만난 후 8일에 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IPI측은 구속된 사주들과 국정홍보처, 한나라당 의원들만 만나고, 일정이 끝나기도 전인 6일 한국을 언론탄압 감시 대상 국가로 분류한다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미 IPI는 방한하기 1주일 전에 한국을 감시 대상 국가에 포함할 것을 만장일치로 의결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조·중·동은 IPI의 돌출 행동은 덮어두고 발표 내용만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9월7일자 기사와 사설을 통해 '한국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최초로 언론 탄압 감시 대상 국가가 되었다'며 일격을 날렸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하루 늦게 9월8일자로 언론 탄압 감시 대상 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사설로 다루었다. 동아는 특히 '부끄러운 언론 탄압 감시 대상국'이라는 제목을 단 사설에서 '나라의 자존심이 상했고 대외 신인도에 영향을 줄 것 같다'라고 말하고, 정부는 IPI와 싸우지 말고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조·중·동은 9월7일 IFJ 크리스토퍼 워런 회장 등 IFJ 대표단이 "한국의 언론 개혁이 급박한 과제이며 언론사 세무 조사가 부당하다는 증거가 없다"라고 발표한 조사 내용은 1단 기사로 처리해 대조를 이루었다.


언론계 인사들은 외국의 언론단체가 한국 언론의 현실을 깊이 성찰하지 않고 내뱉는 말을 자사의 이해에 따라 중계 방송하거나 각색하는 것은 언론 발전에 보탬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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