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양식장에 인신 매매된 '현대판 노예'들의 필사 탈출기
  • 나권일 광주주재기자 (nafree@e-sisa.co.kr)
  • 승인 2001.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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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보낸 한 철, 끔찍했다"/매타작은 기본, 칼에 찔리기도
전남 강진경찰서는 지난 11월15일 노숙자와 알코올 중독자, 정신지체인 등 12명을 각각 80만∼100만 원을 받고 해남과 신안의 김 양식장에 팔아 넘긴 박 아무개씨(43·광주시 광산구)를 '영리 유인' 혐의로 구속했다. 또 박씨로부터 소개받은 인부를 상습 폭행한 양식업자 강 아무개씨(28·해남군 화산면)를 폭행 혐의로 구속하고, 박씨에게 돈을 주고 인부를 소개받은 또 다른 김 양식업자 11명도 '피매매자 수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김 양식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린 피해자 12명은 터미널이나 공원을 배회하다 '좋은 데 취직시켜 주겠다' '밥을 사주겠다'는 박씨의 꾀임에 빠져 김 양식장에 팔려간 것으로 밝혀졌다. 평소 혼자서는 정상으로 생활하기 힘든 이들은 자기가 팔려온 것을 뒤늦게 알고 일부는 도망치다가 붙잡혀 심하게 폭행당했다.


월급 한푼 못 받고 하루 15시간 중노동


지난 11월5일, 인부들과 함께 배를 타고 김 양식장을 탈출한 김영록씨(26·강진군 작천면)의 증언은 말 그대로 '지옥 탈출기'이다.


약간 어눌한 말씨와 행동 때문에 주위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김씨는 지난 8월15일 친구를 만나려고 광주에 놀러갔다가 강진행 막차를 놓치는 바람에 인신매매단에 걸려들었다. 새벽 첫차를 기다리면서 터미널 의자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가 인신매매꾼 박씨의 눈에 띈 것이다. 김씨를 깨운 박씨는 '돈을 많이 벌게 해 주겠다'며 김씨를 유인하고 협박해 전남 해남의 한 여관으로 끌고간 뒤 김 양식업자 강 아무개씨에게 100만원을 받고 현장에서 팔아넘겼다. 김씨는 "안 가겠다고 발버둥치니까 내게 흉기를 들이대며 협박했다. 여관방에서 감시하는 바람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라고 당시 정황을 털어놓았다.


단돈 100만원에 해남군 화산면 ○○도라는 섬으로 팔려간 김씨는 곧바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김씨는 그물발에 김 포자를 붙이거나 그물발을 수선하는 작업을 하다가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양식업자와 동료 인부들에게 얻어맞기 일쑤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7시까지 일했다. 처음에는 일한 만큼 한달에 80만원씩 월급을 준다고 했지만 한푼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일을 못한다고 마구 때렸다."


김씨와 인부 3명이 함께 생활한 합숙소의 주거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좁디 좁은 방 한칸에서 3명이 공동으로 숙식을 해결했고, 씻을 물조차 주지 않아 얼굴과 손발이 때에 찌든 채 바다에 나가 힘든 작업을 반복했다. 배를 타고 나가 양식장에서 일할 때는 양식장 주인이 감시하기 때문에 한눈 한 번 팔 겨를이 없었다. 주인의 집에는 전화가 있었지만, 한 번도 전화기 근처에 가보지 못했을 정도로 속박당했다.


힘든 노동과 상습적인 매타작을 견디다 못한 김씨는 두 번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육지로 나갈 배를 구하지 못해 다시 끌려가 초주검이 되도록 매를 맞았다. 김씨는 "몽둥이로 온몸을 마구 때렸다. 칼로 옆구리를 찌르기도 했다"라며 진저리를 쳤다.


결국 석달 가까이 시달리던 김씨가 동료 인부들과 함께 간신히 배를 얻어 타고 김 양식장에서 탈출한 뒤 바로 파출소에 신고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평소 혼자서는 잘 돌아다니지 않던 김씨가 갑작스럽게 사라지자 가출 신고를 하고 백방으로 찾아나섰던 가족은 그가 돌아오자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며 반겼고, 김씨는 눈물만 흘렸다.


검찰 "인신 매매 조직 개입 가능성 있다"


김씨의 제보를 토대로 해남과 신안·광주를 오가며 2주일간 기획 수사를 해 인신매매 사건을 파헤진 최철웅 강진경찰서 수사과장은 "양식업자들은 인신 매매된 사람인지 모르고 인부로 고용했다고 변명하지만, 피해자들을 위해 월급 통장 하나 제대로 만들어 놓은 게 없었다"라고 말했다.




인신매매꾼 박씨를 검거한 강진경찰서 형사계 형사는 "박씨는 김 양식 주산지마다 전화를 걸어 '사람을 구하지 않느냐'고 물어본 뒤 여관에서 직접 만나 돈을 받고 피해자들을 넘기는 수법을 썼다. 지난해와 올해까지 팔아넘긴 사람만 12명이라고 실토했는데, 더 많은 피해자들이 김 양식장과 염전 지역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강진경찰서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아 정밀 수사를 벌이고 있는 광주지검 장흥지청 최창석 검사는 "박씨의 단독 범행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연계 조직이 있는지 수사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최근 서남해안에서 인신매매단이 활개치는 것은 김 양식장의 면적이 크게 늘어나 인부 구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낙엽송 나무를 이용하는 전통적인 지주(支柱) 식 김 양식이 1990년대 중반부터 스티로폼을 활용하는 부류(浮流) 식으로 바뀌면서 30∼40ha 규모의 양식장을 운영하는 대형 업자들이 생겨났다. 따라서 인력 수요는 늘었지만 예전처럼 섬이나 바닷가에 찾아와 일하겠다는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김 양식업의 특성도 인력난을 부채질하는 요인이다. 김은 대개 9월 말에서 10월에 포자를 합성섬유로 만든 그물발에 붙여서 기른 뒤, 11월 말부터 다음해 2월까지 겨우내 여러 번 채취한다. 추운 겨울에 바다에서 살아야 하는 고된 작업이지만 인부 임금은 월 평균 60만∼80만 원 이어서 상당히 낮은 편이다. 그래서 일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드물다.


김 양식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는 해남군 화산면의 한 주민은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다. 무허가 직업소개소를 통해 사람을 구할 정도이니 인신 매매로 팔려온 사람을 데려다 일을 시켰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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