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앞둔 시장님 · 군수님들 "행사 참가, 바쁘다 바빠"
  • 나권일 광주 주재기자 (nafree@e-sisa.co.kr)
  • 승인 2001.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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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앞두고 행사마다 얼굴 내밀기…
행사비 지원 등 '현직 프리미엄' 만끽
오전 11시 농협이 주최한 노인대학 졸업식, 오후 2시 선비대학 선비학당 수료식, 오후 5시 봉사단체 밀알회 정기총회, 오후 6시 장성 출신 도청 직원들의 모임인 '도우회' 송년 모임. 지난 12월12일 김흥식 장성군수(66)가 얼굴을 내밀거나 참석해 자리를 빛낸 행사들이다.




김군수의 연말 일정은 숨쉴 틈도 없이 바쁘다. 김군수가 참석한 행사장마다 어김없이 "군수님께 큰 박수를 보내드립시다"라는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12일 장성농협 회의실에서 열린 노인대학 졸업식장에서는 '김군수가 노인대학 경비를 군비로 지원하고 노인 공경에 애쓰고 있다'는 칭송이 수차례 흘러나왔다.


김군수는 이처럼 12월10일부터 15일까지 1주일 동안 무려 20개나 되는 크고 작은 모임과 행사장을 직접 찾았다. 김군수는 "매년 연말마다 겪는 의례적인 행사들이다. 항상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내년에 선거가 있다고 해서 특별히 신경쓰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군수가 주민을 만나는 것은 단체장의 고유한 행정 행위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 없다는 말이다.


장성군청 홍보과 관계자는 "행사 참석이 많지만 금일봉이나 음식 제공 등 문제될 만한 일은 전혀 없다. 행사마다 사전 선거운동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선관위에 질의해 철저히 알아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입후보 예정자들의 시선이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년 군수 재출마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이재현 무안군수. 이군수는 12월13일 오전 비바람이 치는 궂은 날씨에도 현경면 동산1리 마을회관 준공식장을 찾았다. 군비를 지원해 총 7천만원을 들여 신축한 마을회관 준공식장에 주민이 군수와 도의원을 초청했기 때문이다.


6·13 지방 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재선·3선을 노리는 단체장들의 모습을 시청이나 군청에서 좀처럼 볼 수 없게 되었다. 중요한 일로 찾아간 민원인이 헛걸음을 하기 일쑤이고, 사전 선거운동 시비도 끊이지 않는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선거 기간으로부터 1백80일 전이 되는 12월15일부터는 단체장이 기부 행위를 할 수 없고, 공공기관의 행사에만 참석할 수 있기 때문에 지난 14일까지 시장·군수를 초청하려는 민간단체와 주민들의 요청이 자치단체마다 쇄도했다. 일부 자치단체는 이 때문에 주요 민간단체 행사를 모두 12월15일 이전으로 '몰아치기' 했고, 월말로 예정했던 행사를 15일 이전으로 앞당겨 치르는 촌극까지 연출했다.


그러자 장성·강진·장흥 등 일부 시·군에서는 일찍부터 사전 선거운동 시비가 불붙어 군청 인터넷 홈페이지가 뜨거워졌다. 장흥군은 군정 비방과 사생활 폭로, 상업적 광고가 많다는 이유로 지난 11월24일부터 자유 게시판을 폐쇄했지만, 사실은 군수의 사전 선거운동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는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입후보 예정자들이 인사 명목이나 각종 단체 위문 활동 명목으로 금품이나 향응을 제공하거나 송년회·동창회·친목회 등 각종 모임에서 금품·향응을 제공하는 행위를 사전 선거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외에도 행사에 얼굴을 내밀고 사업비 지원을 약속하는 단체장의 행정 행위 자체도 포괄적인 선거운동이라는 지적이 많다. 장흥군수 출마 의지를 다지고 있다는 박부억씨(60)는 "현직 군수가 자유롭게 주민을 만나고 다니는 것 자체가 선거운동이다. 출발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공정한 선거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사전 선거운동임이 뻔한데도 군수의 고유한 행정 행위라고 포장하는 사례가 수도 없이 많다는 주장이다.


특히 시·군 예산으로 지원하는 민간단체 행사비는 사실상 사전 선거운동을 위한 금품 제공에 해당한다는 지적이 많다. 전라남도의 경우 1998년 26억원이던 민간단체 행사지원비는 1999년 31억원, 2000년 34억원으로 늘더니 올해는 상반기에만 이미 크고작은 행사에 지출한 돈이 31억원을 넘어섰다. 단체장의 얼굴 내밀기가 잦아지면서 그만큼 시·군이 부담하는 돈이 늘어난 것이다.




단체장들의 가장 강력한 현직 프리미엄은 시·군청 직원들의 생살여탈권, 즉 인사권이다. 단체장들이 공무원 신규 임용 때 공개 경쟁 시험을 마다하고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특채로 공무원을 임용하는 사례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전남도의회 조사 결과 1998년 이후 4년 동안 전라남도와 22개 시·군은 63회에 걸쳐 2백94명에 달하는 공무원을 특별 임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남 함평은 무려 23명이나 특별 채용했다. 전라남도 전체 공무원의 39%가 공개 경쟁 시험을 치르지 않고 공무원이 된 것이다.


장흥군수는 자기 아들을 공무원으로 특채


내년 선거에서 3선을 노리는 김재종 장흥군수는 지난 6월 자신의 아들인 김 아무개씨(28)를 정보통신 분야 9급 전산직 공무원으로 특별 채용해 물의를 빚었다. 정보통신과 사회복지 분야는 공무원 구조 조정과 상관없이 자치단체장의 뜻에 따라 선발할 수 있다는 규정을 김군수가 적극 활용한 것이다. 김군수의 아들은 군청에 20여일 동안 근무하다가 전남도청으로 전보 발령되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이처럼 특별 채용이 늘면서 20대 공무원이 전체의 5%에 불과할 정도로 전남 공무원 사회는 노쇠해가고 있다.


현직 단체장들의 횡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재정자립도 10.1%로 전국 최하위 수준인 장흥군은 내년 예산안에 군수가 타고 다닐 군청 관용 차량 구입비로 4천만원을 책정해 놓았다. 장흥군은 또 3천8백만원을 들여 군의회 의장 전용 차량으로 체어맨 2,300㏄를 구입했다. 이를 두고 장흥군에서는 군수가 잠재적 경쟁자인 도의회 의장에게 도지사 전용 차량과 동급인 최고급 승용차를 선물해 환심을 사려는 것이라는 얘기가 퍼지기도 했다.


현재 전남도 선관위는 내년 지방 선거와 관련해 선거법 위반 사례 1백51건을 적발했다. 그러나 현직 프리미엄을 누리며 사전 선거운동을 벌이는 단체장들을 견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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