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못 벌고 욕만 먹게 생겼네”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2.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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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법인, 감사·컨설팅 분리 정책에 ‘한숨’…책임만 커져 불만



중견 회계법인에서 실장으로 일하는 공인회계사 ㅇ씨는 불만이 많다. “회계사 숫자는 자꾸 늘어나고 회계사 책임도 늘어나는데 사회적 대우는 예전 같지 않다. 요즘 누가 회계사 하려는 사람 있냐.” 그는 예금보험공사가 공적자금 투입 기업에 대한 부실 감사 문제로 소송을 하려는 데 대해 “경영자의 잘못을 회계사에게 넘기는 꼴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불만을 더 키울 소식이 또 나왔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7월29일 국회 업무보고에서 특정 회사에 대한 감사와 컨설팅을 같은 회계법인이 할 수 없도록 하는 개선 방안을 제출했다.


컨설팅·감사 겸업이 문제되는 것은 감사의 독립성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미국 엔론 사의 경우 회계법인 아서앤더슨으로부터 컨설팅과 감사 회계를 같이 받았다. 엔론 사 회계 부정을 아서앤더슨이 눈 감아 준 이유가 막대한 컨설팅 수익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많았다.


올해 초 엔론 회계 부정 사태가 확산되자 국내에서도 컨설팅 업무와 회계 감사 업무를 분리하자는 목소리가 간간이 나왔다. 하지만 구체적인 보고서가 나오기는 처음이다. 금융감독원 회계감리국 감리총괄팀장 이재식 공인회계사는 “늦어도 올해 안으로는 관련 법안을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내 금융 당국이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은 미국의 움직임과도 관련이 있다. 7월24일 미국 의원들은 기업회계개혁법안을 여야 공동으로 확정해 의회에 상정했다.

이 안은 회계법인의 자율적인 감사 권한을 박탈하고, 국가가 회계법인을 조사해 징계할 수 있도록 한 강력한 조처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 한 회계법인이 특정 회사에 대한 컨설팅과 감사를 같이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된 것이다. 이 법안은 의회 통과와 대통령 인준이 유력해 보인다. 1997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회계 제도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는 미국을 따라갈 것이 확실하다. 한국의 금융감독원은 이미 회계법인 감사 권한과 징계 권한을 가지고 있다.


국내 회계법인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한 회사에 컨설팅과 감사를 같이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01년 상장법인과 협회 등록 법인 1천2백63개 회사 가운데 21%에 해당하는 2백66개 회사가 같은 회계법인으로부터 컨설팅과 감사를 받았다. 이것은 1999년 1백79개사, 2000년 2백27개사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런 겸업을 통해 지난해 상장 회사를 대상으로 삼일회계법인은 2백20억원, 안진회계법인은 50억원을 벌어들였다. 비상장 회사까지 포함하면 이 규모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만약 국내에서도 미국처럼 겸업 금지 법안이 통과된다면 회계법인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컨설팅 부문 분사해 위기 돌파 모색할 수도





회계사들은 불만을 토로한다. 한 회계법인의 한 중역은 “컨설팅을 맡은 회계법인은 노하우가 있어 더 나은 감사 업무를 진행할 수 있다. 감사가 부실한 것은 회계사가 양심이 불량해서라기보다 회사의 속임수를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컨설팅과 감사를 분리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한국공인회계사협회 홍보이사 김영식 회계사는 “먼저 컨설팅이 무엇인가를 정의해야 할 것이다. 모든 용역 활동을 다 컨설팅으로 볼 수는 없다. 감사의 독립성을 전혀 해치지 않는 용역 활동도 많다”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도 감사 업무와 무관한 컨설팅은 허용한다는 것이다. 지난 5월27일 금융감독원이 감사와 용역을 같이 한 사례로 지적한 활동에는 세무 조정·외자유치 자문·자산가치 평가·회계 전산시스템 설치 등이 포함되어 있다. 회계법인들은 자산가치 평가처럼 감사 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은 금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전산시스템 설치 활동 같은 용역까지 규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금융감독원 회계감독국 이석준 팀장(공인회계사)은 컨설팅을 정의하는 문제에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공청회 등을 통해 자세한 규정은 차후에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8월 초에 관련 공청회가 열릴 예정이다.
최근 컨설팅 업무는 회계법인 전체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삼일회계법인으로부터 감사와 컨설팅을 동시에 받고 있다. 감사비는 11억원에 불과하지만 용역보수비(컨설팅)는 28억원에 이른다. 회계법인의 본업이 컨설팅인지 감사 업무인지 구별되지 않을 정도다. 삼일회계법인의 한 전무는 “회계법인이 컨설팅 쪽으로 영역을 넓히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다. 숫자를 장악하고 있는 회계법인이 일반 컨설팅 회사보다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회계법인도 살아날 구멍이 하나 있기는 있다. 컨설팅 부문을 독립 법인으로 분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회계법인이 자주 쓰는 수법인데, 국내 회계법인도 응용할 가능성이 높다. 회계법인의 경우 통상적으로 본사가 20% 미만 지분을 가지고 있으면 자회사를 독립 회사로 간주한다. 대주주로서 자회사 지분을 가지고 간판만 바꾸어 컨설팅 영업을 하면 된다. 재벌의 계열사 분리와도 비슷하다.

금융감독원 이석준 팀장은 “만약 계열사 분리를 통해 특정 회사에 대한 감사·컨설팅 겸업 행위가 이루어진다면 딱히 막을 방도가 없다. 다만 회계법인과 컨설팅 회사 사이에 독립성이 지켜지고 있는지 여부는 따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올해 말까지는 넉 달이 남았다. 회계법인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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