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서 속고, 알고도 속아 주고
  • 나권일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2.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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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 기업의 분식 회계 적발 못해…예보, 손해배상 청구해 응징 나서
"분식 회계는 기업주들에게 악마의 유혹과 같다.” 공적자금비리특별수사본부장인 민유태 대검 중수1과장이 지난 7월18일 기업들의 심각한 회계 부정 실태를 한탄하며 한 말이다. 대검찰청이 지난해 12월부터 중수부에 특별수사본부까지 꾸려 공적자금 실태를 조사해 보니 비리의 가장 밑바탕에는 어김없이 분식 회계가 있었다.


기업이 분식 회계로 매출을 부풀리면 금융권 대출이나 회사채 발행이 쉬워진다. 대출금의 상당액은 자꾸 커지는 기업의 부실을 감추거나 사업 확장을 위한 로비 자금이 되어 정·관계로 흘러든다. 기업 부실이 커지면 금융권이 부실해지고, 결국 국민이 부담해야 할 공적자금을 금융권에 투입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1998년에는 금융감독원 감사 대상 기업의 65%가 분식 회계를 저질렀다. 미국이 분식 회계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한국은 최근까지도 상장 회사 5개 가운데 1개꼴로 회계 부정을 저지른 것으로 적발된 ‘분식 회계의 천국’이었다. 지난해 4월에는 10억원을 받고 분식 회계를 눈감아준 공인회계사 2명이 구속되었다. 미국의 회계 부정 파장이 커지면서 국내에서도 외부 감사와 컨설팅 업무를 동시에 맡는 것을 금지할 움직임이어서 대형 회계법인들이 크게 요동하고 있다(40·42쪽 딸린 기사 참조).


“분식 회계는 정치 비리보다 더 악질 범죄”


분식 회계 방법은 간단하다. ‘비용’은 축소하고 ‘이익’은 부풀려 흑자가 난 것처럼 재무제표를 꾸민다. 검찰에 따르면, 의류업체인 보성그룹은 주력 기업이 적자를 보자 계열사가 재고 의류를 판매한 것처럼 회계를 조작해 1백46억원 적자를 30억원 흑자로 둔갑시켰다. 검찰의 공적자금 수사 결과 보성그룹과 SKM(선경마그네틱) 등 공적자금 비리와 관련된 기업들이 분식 회계로 금융기관을 속여 타낸 돈은 3천2백억원이 넘었다.
검찰 수사는 공적자금이 투입된 제조업체에 집중되었지만, 벤처 기업들도 매출 부풀리기 수법으로 곧잘 분식 회계를 저지른다. 코스닥에 등록해 주가 시세 차익을 노리는 욕심이 회계 부정을 부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디지털 미디어 업체인 ㄱ사는 비슷한 성격인 미국 기업 ㄴ사의 지분 5%를 5백만 달러를 주고 인수한다. ㄴ사는 다시 ㄷ사(서류에만 있는 ‘페이퍼 컴퍼니’인 경우가 많다)에 이 돈을 빌려준다. 그런 뒤 ㄷ사는 ㄱ사 제품의 미국 판권을 5백만 달러를 받고 구입한 것으로 처리한다. 그리고는 외국에 국산 컨텐츠를 수출했다고 언론을 통해 알려 코스닥 상장 분위기를 띄운다.


이같은 매출 부풀리기 허점은 간단하다. 회계 장부로만 보면 ㄱ사는 매출 5백만 달러가 발생한 셈이지만 사실은 자기 돈이다. 문제가 된 ㄱ사는 지난해 10월 증권업협회와 코스닥위원회 예비심사 과정에서 이런 사실이 드러나 코스닥 등록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한 벤처 거품 때 분식 회계가 광범위하게 저질러졌다는 것이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재무제표에 대한 공인회계사의 회계 감사를 거쳐 작성된 감사보고서는 기업의 재무 상태를 드러내는 가장 객관적인 자료이다. 기업들이 분식 회계를 했다면 감사보고서도 부실덩어리가 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나라 상당수 기업의 회계 장부가 허위이기 때문에 정부와 언론이 관심을 갖는 경제성장률이며 국내총생산도 다 허위일 수밖에 없다. 공인회계사 윤종훈씨는 “나라 경제를 중시하는 시각에서는 대통령 친인척들의 비리보다 분식 회계가 더 심각한 악질 범죄다”라고 주장했다.





공인회계사 처벌 강화 위한 법안 ‘낮잠’


이 때문에 분식 회계를 자행한 기업주에 대한 처벌은 더 강화되고 있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우리은행 등 채권금융기관들은 워크아웃이 진행 중인 고합(전 고려합섬)의 전·현직 임직원에 대해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보성인터내셔널과 SKM·진도·대우 등 기업주들도 줄줄이 거액의 소송을 당하게 될 형편이다.


하지만 분식 회계를 적발해내지 못한 공인회계사에 대한 처벌은 여전히 솜방망이 수준이다. 재정경제부는 부실 감사를 한 회계사에게는 1억원, 회계법인에 대해서는 최고 5억원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과징금 부과는 과실이 아주 중대한 경우에 한정하고 있다. 분식 회계를 고의로 눈감아주는 경우에만 공인회계사를 검찰에 고발한다. 아무리 찾아내려 해도 기업이 조직적으로 감추면 분식 회계를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는 공인회계사들의 항변을 재경부가 어느 정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금감위는 올해 상반기에도 분식 회계 등 기업 회계 기준을 위반한 25개 사를 적발했지만 문제가 된 회계법인 11곳과 공인회계사 46명에 대해 감사업무 제한 및 직무정지 등 가벼운 제재를 하는 데 그쳤다.


공인회계사 처벌을 강화한 증권거래법 개정안도 잠자고 있다. 민주당 이훈평 의원 등은 지난 5월22일 ‘적정 의견’을 받은 결산보고서가 허위로 기재된 것으로 드러나면 해당 공인회계사를 5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한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도 재경위 심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대형 회계법인들과 공인회계사들도 이제는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공적자금 관리 기관인 예금보험공사(예보)는 분식 회계에 연루된 회계법인들을 상대로 수백억원대 손해배상을 청구할 방침이다. 소송에 지면 회계법인들은 파산할 수도 있다.


금융감독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증선위·위원장 유지창)에 따르면, 분식 회계가 적발된 기업의 외부 감사를 맡았던 회계법인 명단에는 삼일회계법인을 비롯해 안진·영화·삼정 등 메이저들이 줄줄이 다 올라 있다.
예보는 이 가운데 워크아웃이 진행 중인 고합과 대우의 외부 감사를 맡았던 안진·영화 회계법인(고합)과 옛 산동회계법인과 안건·안진(대우)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예보가 처음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주)고합의 1998 회계 연도 장부를 조사해보니 비용으로 처리해야 할 ‘제조 경비’를 ‘자산’으로 계상한 사실이 적발되었다. 공인회계사가 조금만 신경쓰면 알아챌 수 있는 분식 회계였다. 예보는 이같이 간단한 사항마저 감사인이 지적하지 못했다면 감사 절차를 소홀히 한 책임을 충분히 물을 수 있다고 본다.


예보의 이런 방침에 대해 회계법인들은 불만을 터뜨리고 있지만 시민단체들은 환영 일색이다. 참여연대는 가을 정기국회 때 미국처럼 투자자인 주주들이 금전적 손해를 배상받을 수 있도록 하는 ‘증권 집단소송제’ 입법운동에 다시 적극 나서 공인회계사들을 압박할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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