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삼청교육대는 끔찍했다
  •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2.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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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유린 피해자 319명, 지독한 후유증에 시달려…경찰, 실적 올리려 주부도 연행
'6만7백55명 검거. 4만3백47명 군사 훈련.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와 환자만도 각각 3백79명, 2천7백명.’ 지난 10월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80년 시행된 삼청교육(일명 순화교육)에 대한 조사 내용을 발표했다. 삼청교육 사망자가 50명이라는 국방부의 발표와는 딴판이다.





삼청교육은 1980년 7월29일자 삼청계획 5호에 따라 추진된 사업이다.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는 불량배를 소탕한다며 삼청계획 5호를 기획했다. 삼청교육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당시 이 계획을 세운 국보위 사무실이 삼청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4만여 삼청교육 피해자 중에는 여성도 상당수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여자 삼청교육대원은 모두 3백19명. 이들은 강원도 오음리 훈련장에서 2∼6주 훈련을 받았다. 교관은 여군들이 맡았다.



충남 서산에 사는 고 아무개씨(66)는 여자 삼청교육대 출신이다. 1980년 8월 경찰이 조사할 것이 있다며 고씨 집을 찾아왔다. 염전 문제로 마을 주민과 분쟁을 하던 상황이었다. 서산경찰서에 연행된 고씨에게 수사과장은 “인원이 부족하니 새마을 교육(삼청교육) 받으러 가야겠다”라고 말했다. 항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새벽 6시부터 구보하고 포복 훈련을 했다. 땅바닥에 머리를 박는 기합을 받았다. 행동이 늦으면 고무 양동이에 물을 퍼다가 머리를 집어넣었고, 반항하면 몽둥이로 때리고 여군 여러 명이 몰려와 짓밟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수련생 전체 반장으로 지명되어 가혹 행위는 당하지 않았지만 3주 정도 훈련을 마치고 병원에 가서 등뼈에 이상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여자 삼청교육 대상은 윤락여성·포주·계주 들이었지만 간혹 평범한 가정 주부도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삼청계획 5호는 소탕 대상을 ‘개전의 정 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등으로 막연하게 규정했고, 경찰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경찰서 조사 과정에서 알몸 신체 검사를 받는 것은 예사였다.



당시 군 관계자는 “처음에는 5백명 정도가 부대에 입소했다. 경찰이 엉터리로 잡아다 인계해 정말 기가 막혔다. 내무부장관에게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불 외판을 하던 한 파월 장병 아내는 이불을 팔 욕심에 짜장면 내기 화투판에서 구경하며 기다리다 도박죄로 붙들려 갔고, 열다섯 살짜리 여학생 7명은 명동에서 편싸움을 구경하다가 잡혀 갔다. 이 관계자는 “40명 정도가 전북에서 버스를 타고 왔는데, 경찰에 뒷돈을 쥐어 주고 중간에 내렸다는 말도 들었다”라고 말했다. 심사를 마치고 2백명 정도가 귀가했다. 이 관계자는 “상관은 진급 욕심 때문에서인지 육체적으로 혹독하고 강한 훈련을 시키라고 지시했다”라고 밝혔다.






피해 보상 신청했다가 인생 더 망가져



훈련 이후 이들에게는 ‘삼청교육 이수자’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부산에 사는 강 아무개씨(60)는 1980년 8월 초 집에서 자다가 ‘신원 조회를 하자’며 갑자기 찾아온 경찰에게 붙들려 영도경찰서로 잡혀갔다. 전날 근처 횟집에서 술값 시비를 벌인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밤새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화투 치다 왔는교?” “춤추다 왔는교?” 강씨는 무슨 죄인지도 모른 채 “잠 자다 왔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경찰은 서류에 손도장 찍기를 거부하는 강씨에게 “이 ××년, 너 하나 죽이기는 개 죽이기보다 쉽다”라며 ‘조인트를 깠다’.



삼청교육을 받고 온 뒤 강씨는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창피해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잡혀가고 난 뒤 경찰은 마을 사람들에게 강씨 아줌마의 나쁜 점만 얘기하라며 조사를 해갔다. 그녀는 1988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이 피해 보상을 해준다는 발표만 믿고 피해 신고를 했다. 그러나 그때 인우 보증을 선 두 사람마저도 경찰에게 ‘왜 쓸데없는 일을 하냐’는 등 시달림을 당했다. “입을 연 게 너무 후회스럽다. 경찰이 조사한다고 들쑤시는 바람에 사돈까지 내가 삼청교육 갔다 온 걸 알게 되었다. 이제는 전생의 업보로 생각하고 입 다물고 살고 싶다. 자식들까지 기 못펴고 사는 게 너무 괴롭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 이름은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정부는 10년 가깝게 여성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을 전산 관리했다. 주민등록 등본에 이를 표시하는 바람에 이들은 취업에도 불이익을 받았고, 이사를 갈 때마다 동사무소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주민등록 등·초본 상단에 ‘삼청교육 순화교육 이수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라고 전영순씨(64)는 말했다. 다른 피해자 박 아무개씨는 “너무 창피해 주민등록 관련 서류가 들어가는 일자리는 아예 포기했다”라고 말했다.
군사 정권 시절 대표적 인권 침해 사건인 삼청교육대 사건. 삼청교육 여성 피해자들은 ‘갈 만하니까 갔겠지’ 하는 세간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했다.


실제로 정신적 피해 보상 소송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 피해자도 겨우 2명이다. 이경우 변호사(47)는 “왜, 어떤 이유로 끌려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법원에 영장을 청구하는 등 적법한 절차 없이 위법한 방법으로 끌어가 신체의 자유를 훼손하고 인권 침해를 했다는 게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10월1일 의문사위는 삼청교육이 정부에 의해 위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인 만큼 정부가 진상을 조사하고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배상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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