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퇴직 아픔을 아는가”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2.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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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해직자들, 신 건 원장에게 명예 회복 요구
신건 원장 체제의 국정원이 임기 말에 안팎으로 홍역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우선 한나라당이 대선 전략으로 제기한 도청 문건 의혹 파문의 종착점이 그 실체적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차기 정권의 국정원 개편설로 이어지고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국정원을 폐지하는 대신 국가 이익을 위한 해외 정보 수집 및 테러 방지 기능, 방첩 기능에 전념하는 조직으로 탈바꿈시키겠다고 공약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 역시 국정원 명칭 변경(해외 정보처)과 해외 정보 수집 및 분석에 치중하는 정보기관으로 기능을 개편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이런 기류로 볼 때 누가 집권하든 새 정부가 들어서면 정보기관이 다시 한번 탈바꿈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원칙·절차 없이 이루어진 해고는 부당”


이같은 상황에서 현정권 초기에 대량 해직되었던 국정원 간부 50여 명이 모임을 만들어 신 건 국정원장을 상대로 명예회복을 주문하고 나서서 주목된다. 이들은 지난 9월 중순 `‘국정원을 바로 세우고 강제퇴직자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모임’(국강투)을 결성한 이래 신원장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공개 질의서를 보냈다. 1998년 조직 개편을 내세워 직원 7백여명을 강제 해직한 조처가 부당 인사였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국강투 강신호 회장(전 대공정보단장)은 “다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후배 공무원에 대한 대량 해직과 강제 퇴직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우리가 나섰다”라고 말한다. 정보기관 공무원은 누가 정권을 잡든 국민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인사 관행이 정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선을 앞두고 이들이 갑자기 나선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차기 정부가 어떻게든 자기들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요구가 담겨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억울함이란, 해직 과정이 납득할 원칙·기준·절차가 없이 특정 지역 출신을 중심으로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시 안기부 내부의 정보·지휘부·대공 수사 등 3개 조직 내부의 특정 지역 출신 인사들이 비공식 문건인 살생부를 만들어 뿌려대면서 광범위한 학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현정권 초기 국정원 인사는 크게 3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998년 3월 하순에 1급 20여 명이 국정원을 떠났다. 1급의 경우 통상 정권이 바뀌면 자동으로 물러나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에 별 말썽이 없었다.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그 해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년에 걸쳐 이루어진 2급 이하 6급까지의 대량 해직 사태이다. 4월1일 2, 3급 1백23명이 우선 대기 명령을 통해 해직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서기관급 이하 6급까지 5백여 명 해직이 뒤를 이었다.


당시 국정원 직원의 해직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대기 발령 명령을 낸 후 자진 사퇴를 종용해 여기에 응한 사람은 ‘명예 퇴직’으로, 끝내 응하지 않은 대상자는 불명예스런 직권 면직 처분으로 내보냈다. 이번에 모임을 결성한 국강투 회원들은 바로 명예 퇴직을 당한 사람들이다. 면직 처분을 받은 직원들은 ‘국사모’(회장 송영인)를 따로 구성해 국정원을 상대로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다.


어떤 경위로 해직되었든 이들은, 당시 징계나 실정법 위반 판결을 받은 바도 없는 직원들을 상대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대량 해직했다는 점을 들어, 국가공무원법과 국정원직원법 규정에 어긋났다고 주장한다. 또 부득이하게 해직시킬 경우 보장해야 할 당사자 변소(辯訴) 권리도 없었다는 것이다.


새 대통령의 숙제로 넘겨질 듯


이런 사정 때문에 강제 해직자 중 직권 면직된 국사모 회원 21명은 해직 후 행정법원에 불복 소송을 냈다. 이 소송 과정에서 쟁점이 되었던 국정원직원법 비밀 준수 의무조항의 위헌 여부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최근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내년 12월 말까지 관련 법을 고치라고 판결했다. 이로써 국사모 회원들은 재판을 통해 법적인 보상과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열렸다. 국강투 역시 지난 11월25일 국정원을 상대로 강제 퇴직 무효를 다투는 행정 소송을 냈다. 이와 함께 국정원이 직접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국강투 회원들이 신 건 원장을 상대로 최근 잇달아 공개 질의서를 내자 국정원은 무척 곤혹스럽다는 반응이다. 특히 경위야 어떻든 여태까지 가만히 있다가 선거를 앞두고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이 바람직한가를 놓고 내부적으로 크게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보관실의 한 관계자는 “당시 정부의 어느 조직이든 구조 조정으로 진통이 다 있었듯이 국정원도 고심 끝에 나갈 분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살생부가 나돌아 해직된 분들에게 억울한 마음도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특정 지역 출신만 집중적으로 해직했다는 국강투의 주장에 대해 “오랜 기간 영남 출신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쌓인 폐해를 완화한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측면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국정원측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해당 부서와 국강투 사이에 원만한 대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강투가 최근 신 건 원장을 압박하는 데는 나름으로 이유가 있다. 이들은 대량 해직 사태가 있을 당시 신원장이 국정원 2차장으로서 자기들의 해직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지 않으냐는 점을 강조한다. 당시 신원장은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정보기관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급 요원들을 하루아침에 대량으로 내보내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며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DJ 정권 실세들이 밀어붙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 해직자들의 인식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대선이 끝난 후 차기 대통령이 풀어야 할 숙제가 될 것이 틀림없다. 역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서정 쇄신과 숙정이라는 명분으로 국정원 직원들이 무더기로 해직된 아픔을 후배 세대에게 물려주어서는 안된다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새로 뽑힐 대통령이 어떻게 화답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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