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느끼며 불덩이 속으로…
  •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3.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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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대원 48시간 동행 취재기/화재 진압에서 취객 이송까지 전천후 해결사


지난 1월9일 오후 6시57분. 벨소리가 울렸다. 특전사 출신 구조대원 5명이 대기실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그러나 이내 맥이 빠지고 말았다. 사이렌이 아니고 ‘딩동딩동’ 하는 벨소리여서 화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건 개방 출동’이라는 방송이 나오자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시건 개방이란 잠긴 문을 따주는 일이다.


5분여 뒤 영등포구 양평2가의 한 아파트. 신고자 김 아무개씨는 10층 아파트에 산다. 그래도 20층 이상 고층이 아니라 다행이다. 아무리 특전사 출신 대원들이라지만 아파트 열쇠를 따기 위해 로프에 의지해 베란다로 내려가는 모습은 위험해 보였다. 구조대원 3명이 11층으로 올라가 로프를 이용해 10층 베란다로 들어갔다. 현관 입구에 묶어 놓은 큰 개가 앞발로 보조키의 안전핀을 눌러서 문이 잠긴 것이었다.


한 구조대원은 “참 딜레마다. 소방관이 문을 따주는 장면이 몇 번 방송되니까, 이제는 너도나도 소방서로 연락한다. 열쇠수리공을 부르면 돈이 드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새벽 3시에 취객이 자기 집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해 베란다로 들어가기 위해 위층 초인종을 눌렀다가 ‘소방관이 새벽에 잠 깨우는 사람들이냐’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그래도 오늘은 초저녁이라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기자는 1월8일 오전 9시부터 10일 오전 9시까지 48시간 동안 서울 영등포소방서에서 ‘임시 소방관’으로 동행 출동했다. 이 소방서 관할 지역에는 14만 세대 41만명(22개 동)이 살고 있다. 영등포 중앙시장·쪽방촌·윤락가 등 화재경계지구가 많은 데다가 관할 지역인 여의도에 주요 고층 건물이 많아 출동도 빈번한 편이다. 또한 한강 둔치에 수난구조대를 운영하고 있다(61쪽 상자 기사 참조).


현장 소방관은 셋으로 나뉜다. 화재 진압을 맡는 경방, 인명 검색을 위해 언제나 화재 현장에 제일 먼저 뛰어드는 구조대, 응급 환자를 이송하는 구급대. 방수복(겉옷) 색깔도 다르다. 지휘관은 노란색, 구조대는 주황색, 경방은 잿빛 방수복을 입는다.


사이렌 울려도 차들이 비켜주지 않는다


소방관은 영어로 ‘fire fighter’이다. 그러나 소방관을 ‘불과 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소방관이 불과 싸우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틀 동안 함께했던 소방관 2백52명은 노숙자의 하소연을 듣는 상담원으로, 산소 호흡기를 들고 달려가는 생명구조원으로, 로프를 타는 열쇠수리공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1월8일 오후 1시48분. ‘딩동댕’ 벨이 울렸다. 구급 신호다. 소방관들은 벨소리만 들어도 출동 내용을 알 수 있다. 구급 신호는 ‘딩동댕’, 구조 신호는 ‘딩동딩동’. 화재 신호는 ‘위이잉’ 하는 사이렌 소리다. 어떤 경우라도 구급차는 함께 출동한다. 출동 차량이 차고 문을 통과해야 하는 시간은 주간에는 20초, 야간에는 30초다.





영등포역 앞. 역 앞에서 걸려오는 구급 신고는 대부분 노숙자를 이송해 달라는 내용이다. 공중 전화로 ‘공짜 119’를 눌러 ‘귀 부상’이라고 신고한 40대 무전취식자 손 아무개씨는 “귀 뒤쪽으로 두통이 있다”라고 말했다. 어느 병원으로 갔으면 좋겠냐고 소방관이 묻자 그는 “국가기관으로 가”라고 대답했다. 보건소로 가자는 말이다. 그에게서 술 냄새가 심하게 났다. 보건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는 “공무원 사회가 썩었다” “경찰이 목을 비틀고 폭행했다”라며 횡설수설했다. 동승한 소방관은 “하루에 스물두 번 구급 출동을 했는데, 그 중에서 노숙자와 취객 이송만 스무번 정도 한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1월8일 오전 11시19분. 당산동 노들길에서 정면 충돌 교통 사고가 나 응급 환자가 발생했다. 김준우 소방교와 고봉순 소방사는 무전으로 환자 상태를 확인하며 차를 몰았다. 119 구급차가 출동하는데도 차들이 비켜주지 않는다. 사이렌을 울려도 소용이 없다. 김준우 소방교는 “환자를 이송하다가 길이 막혀 정차하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승용차 운전자가 ‘뒤에 환자 없죠?’라며 확인해 보자고 한 적도 있다. 자기 가족이 구급차에 탔다면 그럴 수 있을지…”라고 말했다. 더 지체할 수 없는 상황. 구급차가 중앙선을 넘어갔다. 그런데 이럴 때 교통 사고가 나면 소방관 책임이라고 한다.


5분 후 사고 현장. 용달차를 달고 오던 견인차에서 차가 떨어져 마주오던 승용차를 덮쳤다. 승용차 뒷자리에 타고 있던 이 아무개씨가 충돌 순간 보조석 앞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혔다. 눈가에 핏자국이 맺히고 한쪽 다리가 골절된 듯했다. 고봉순 소방사는 먼저 경추보호대를 부착해준 다음, 의식이 있는지 확인했다. 119 구급차는 통상 환자가 원하는 병원으로 가지만 급한 경우는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간다. 병원으로 가는 길, 사이렌을 울려도 일반 차량들이 길을 열어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밤 10시48분. 벌써 이 날 하루에만 열한 번째 출동. 영등포역 앞 쪽방촌 입구, 40대 남자가 길에 누워 있다. 역시 술 냄새가 진동했다. 혈압부터 쟀다. 정상이다. 심야에 술취한 노숙자 신고가 들어오면 구급대원은 난감하다. 병원도, 노숙자 쉼터도, 경찰도 술취한 노숙자를 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에 구급 출동 39회, 화재 출동 4회


고봉순 소방사가 술취한 노숙자의 옷을 뒤졌다. 1종 보호 대상자이면 그나마 시립병원에 데려가 진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갑에는 ‘신용카드 대출’ ‘일수 대출’ 따위 홍보 명함만 들어 있고, 돈은 한푼도 없었다. 영등포소방서 뒤편에 있는 충무병원으로 달렸다. 다행히 병원이 ‘비응급 노숙자 환자’를 받아주었다. 김준우 소방교는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병원이 받아주지 않으면 경찰서에 가서 행려자 증명서를 발급받아 시립병원으로 가야 한다. 시립병원도 술취한 행려자는 잘 받아주지 않는다. 어떡하겠나. 한번 신고를 접수한 이상 조처를 해야 하는데. 밤새 쉼터·병원·경찰서·구청을 헤매고 다녀야 한다.”





1월10일 오전 1시3분. “하나아홉(화재) 사팔(목적지)은 문래동 3가” “꽃(불)과 구름(연기)이 보이지 않는다” “지하다, 지하!” 지휘차와 지령실 사이에 다급하게 무전이 오간다. 오전 1시8분, 기자가 함께 도착한 화재 현장은 문래동 ㅎ아파트 지하 공사장. 지하 주차장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왔다. 펌프차는 더 진입할 수 없는 상태. 진압계장과 구조대원이 제일 먼저 현장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경방들이 (물)탱크차와 펌프차의 수관을 연결하고, 15m짜리 수관 5개를 연결했다.


검은 연기로 가득한 지하 공사장 안 임시 사무실 쪽창으로 화염이 넘실거렸다. 구조대와 경방들은 모두 12kg짜리 공기호흡기를 착용했다. 영화에서 옷을 풀어헤치고 공기호흡기를 쓰지 않은 채 인명을 구조하는 소방관의 모습은 거짓에 가깝다. 큰불이 나면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검은 유독 가스가 가득 차고, 5초에서 10초만 흡입해도 곧바로 정신을 잃기 때문이다.


구조대가 갈고리와 도끼로 문짝을 내리쳤다. 합선인지, 문짝을 도끼로 내리칠 때마다 전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다행히 사람은 없었다. 구조대장이 사무실 안을 손전등으로 살폈다. 가스통이라도 있으면 화재 진압 도중 폭발해 대형 인명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방 5명이 40mm짜리 수관을 끌고 들어가 물을 방사했다. 잔화 정리까지 걸린 시간은 5분여. 임시 사무실 안에 있던 정수기와 연결된 멀티탭 전기 배선이 합선되어 일어난 화재였다. 화재 현장에 5분 남짓 머물렀을 뿐인데 밖에 나와보니 옷이 검은 그을음투성이였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코 밑이 새카맣다. 오전 1시50분, 화재 진압을 마치고 차량 12대, 소방관 41명이 소방서로 귀소했다. 1월9일에서 다음날 오전 6시까지 영등포소방서 화재 출동 건수는 4회, 구급 출동은 39회였다.


“소방 전문 병원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


소방관에게는 고향이 없다. 대부분 오전 9시부터 다음날 9시까지 24시간 근무하고, 맞교대를 하기 때문에 고향에 갈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출동 명령에 촉각을 세우며 24시간 근무하고 나면 몸은 파김치가 된다.
소방관들은 화재를 진압하다가 화상을 입거나 부상해도 자비로 치료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소방서에서 직원들 모금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소방관은 “우리 소방서에도 화재 진압 도중 넘어져 다리에 철심을 박은 동료가 있다. 대부분 작업복을 벗으면 곳곳에 화상 자국이 있다”라고 말했다.

중랑소방서 윤정금 예방과장이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현장 활동 소방대원의 90.3%가 각종 재난 현장에서 외상을 입었고, 소방관 중 55.1%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거나 심하게 다쳤다. 이들은 “소방 전문 병원이라도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라고 바란다. 그러나 현행 행자부 소방국 체제로는 예산을 따내기가 쉽지 않다. 2001년 3월 서울 홍제동 화재 참사 이후 정부가 처우 개선을 약속했지만 공치사에 그쳤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이번 대선에서 소방청 신설을 공약했다. 소방관들의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1월10일 아침 9시. 24시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한 소방관은 말했다. “검은 연기가 하얀 연기로 바뀌면, 화재 현장에서 불과 사투하는 소방관이 있었다는 것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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