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노동자들, ‘유령’이 압박해 항복했나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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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으로 위치 추적당한 삼성 노동자들, ‘소 취하’ 잇달아 의문 증폭
배후는 누구인가. ‘유령 인물’이 삼성그룹 전·현직 노동자들의 휴대전화를 복제해 장기간 이들의 위치를 불법으로 추적한 사건이 불거진 지 두 달이 지났다. 지난 7월11일 MBC <시사매거진 2580>이 ‘유령의 친구 찾기’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한 이후 참여연대·다산인권센터·민주노동당 등 22개 단체는 ‘삼성 노동자 감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만들어 이 사건의 배후를 밝히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런저런 정황만 무성할 뿐 아직 이렇다 할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위치를 추적당한 삼성 전·현직 노동자 12명은 자신들의 위치를 추적한 ‘누군가’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 김인주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 김순택 삼성SDI 사장 등을 지난 7월13일 검찰에 고소했다. 이들이 ‘누군가’에게 휴대전화를 불법으로 복제시켜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추적하도록 해서 통신비밀보호법과 전파법을 위반한 혐의가 있으니 처벌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사건의 배후에 삼성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공대위가 삼성 의심하는 여섯 가지 이유

이들의 변호를 맡고 있는 김칠준 변호사는 대략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삼성 배후설’을 주장한다. △위치를 추적당한 피해자가 하나같이 노조 결성에 적극적인 삼성SDI 직원이거나 해고자였다 △자신도 모르게 복제되어 위치 추적에 이용된 휴대전화 주인 가운데 피해자와 함께 근무했던 삼성SDI 전 직원이 있다 △2003년 7월부터 2004년 6월쯤까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위치를 추적당했다 △ 복제 휴대전화 한 대로 여러 명을 추적했다 △복제 휴대전화의 발신 기지국이 삼성SDI 공장이 있는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신동인 경우가 많았다 △피해자들이 모임을 가졌을 때 집중적으로 추적이 이루어졌다.

김변호사는 “소송에 동참하지 않은 피해자가 더 있는 것으로 밝혀져 확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피해자 중에는 3개월간 6백50차례, 하루 최고 49차례에 걸쳐 위치를 추적당한 사람도 있다. 지난 5월16일 부산 다대포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던 피해자 3명은 집에서 출발하는 순간부터 잠을 잔 장소, 다음날 수원으로 돌아올 때까지 모든 궤적을 추적당했다. 그 날 대회에 참가했던 한 피해자는 “마라톤 코스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게 추적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의심하겠나”라고 반문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월30일 노동자 두 사람이 고소를 취하하는 등 최근 들어 네 사람이 잇달아 고소를 취하해 사건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고소를 취하한 노동자들은 모두 삼성SDI에 근무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공대위 실무를 맡고 있는 노영란씨는 “삼성이 고소인들에게 고소를 취하하라고 협박과 회유를 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삼성SDI 홍보팀 관계자는 “(네 사람이 고소를 취하한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일이다”라고 말했다.삼성이 ‘배후’라고 단정할 증거는 없어

그러나 공대위는 지난 9월7일 기자회견에서 “삼성측이 감시조를 편성해 작업장 1m 내에서 온종일 감시하고, 퇴근 후에도 미행을 계속했으며, 집으로 찾아가 가족에게까지 협박함으로써 피해자들에게 큰 괴로움을 안겨준 사실을 여러 경로로 확인했다”라고 주장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피해자 또한 “관계자들을 고소한 이후 지난 몇 달간 삼성측은 냉온 작전을 폈다. 해외 사업장에 나가 근무하겠느냐고 회유하기도 했고, 현장에서 동료 사원들을 통해 감시했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삼성의 한 관계자는 “고소인들이 사건이 의외로 확대되자 마음에 부담을 느껴 스스로 고소를 취하한 것으로 안다”라며 회사측이 압력을 가하고 회유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공대위는 고소 취하가 잇따르자 지난 9월7일 기자회견을 갖고 삼성을 규탄한 데 이어 8일부터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며 검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검찰이 수사에 미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대위 노영란씨는 일단 9월 말까지 1인 시위를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대위측은 민사 소송을 통해 증거를 계속 확보해 가면서 독자 조사 활동도 벌이고 있다. 한 피해자는 “아직은 공개할 수 없지만 사건의 실체를 좀더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 검찰 수사를 보면서 대응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여러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 사건의 배후가 삼성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르다.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삼성SDI의 한 관계자는 “우리와는 무관한 사건이다. 회사 이름이 자꾸 오르내려 우리도 피해를 보고 있다. 검찰 수사가 빨리 진행되어 진실이 밝혀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검찰은 7월 말쯤 SK텔레콤과 KTF를 방문해 휴대전화 복제, 위치 추적과 관련한 자료를 받아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소인들에 대한 소환 조사도 진행하고 있다.

통신회사 관계자는 휴대전화를 복제하려면 휴대전화 번호와 일련번호 그리고 제조업체의 제조번호 등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검찰이 적극 수사하면 배후를 밝힐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사건이 미궁에 빠질 수도 있다고 내다보았다.

배후는 삼성인가 아닌가. ‘유령’을 밝혀낼 열쇠는 검찰이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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