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은 ‘압박의 감초’인가
  • 남문희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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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설 이어 이라크 이동설까지 ‘솔솔’…“파병 관철 위한 미국 국방부의 작전”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서양에서는 폴란드와 한국을 비교해서 말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한다. 폴란드를 ‘유럽의 한국’으로, 한국을 ‘아시아의 폴란드’로 부른다는 것이다. 양국이 처한 지정학적 운명 때문이다.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 등 3대 강국에 둘러싸인 폴란드는 이들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왔다. 지난 천년 동안 세 차례나 나라가 지도에서 사라지는 수모를 겪었고, 18세기에는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에 의해 세 토막으로 나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첫 진군 나팔 역시 폴란드를 향해 울렸고, 냉전 시대에는 소련의 그늘에서, 오늘날에는 게르만 독일의 위협을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다른 지역으로 나라를 옮겨가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와 꼭 닮은꼴이다.

독일 통일 문제를 비롯해 유럽 정세에 밝은 이인석 인천발전연구원장(전 청와대 경제비서관)에 따르면, 폴란드는 그동안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압제자에 대항해온 독특한 전통을 유지해 왔다. 그 수단이 바로 파병이요 참전이었다. 예컨대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침공할 때 폴란드는 독립을 허용해주는 대가로 파병을 제의했다. 당시 참전한 폴란드군 10만명은 거의 대부분이 사망했다.

독립에 대한 폴란드의 집념은 러일전쟁 때에도 발휘되었다. 이인석 원장에 따르면, 당시 폴란드 특사가 일본을 방문해 일본이 무기를 대준다면 러시아의 서쪽을 폴란드가 공격하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은 러시아는 일본이 맡는다는 일본의 오만에 의해 거절당했다.

미국이 ‘폴란드 사단’을 거론한 까닭

대부분의 국가가 반대하는 이라크 전쟁에 폴란드가 미국을 편들고 선뜻 참전까지 하게 된 배경도 위와 같은 맥락이다. 폴란드는 참전을 계기로 미국이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미국 역시 최근 들어 소원해진 독일과 프랑스를 견제할 발판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지난 5월 말 유럽 순방에 나선 부시 대통령은 제일 먼저 바르샤바를 방문했다. 두 달 뒤에는 폴란드 총리가 독일과 프랑스 총리를 불러다가 자신의 뒤에 미국이 버티고 있음을 은연 중에 과시하기도 했다. 지난 9월3일 청와대를 찾은 미국 국방부 롤리스 부차관보가 한국 정부에 이라크 파병을 공식 요청하면서 ‘폴리시 디비전’(폴란드 사단)을 예로 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폴란드 사단’에 대한 국내의 논의는 파병 규모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폴란드와 한국의 지정학적 운명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정학적 운명이 비슷하고, 또 설령 미국이 폴란드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암시했다 하더라도, 이라크 파병이 한국과 폴란드에 전해주는 울림은 현재로서는 매우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폴란드의 경우 자신들의 안보 취약점을 메우기 위해 파병을 선택한 것이지만, 한국은 한국의 취약점이 빌미가 되어 파병을 강요당하는 듯한 형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폴란드에서와 같은 파병긍정론이 아직 대세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파병 문제가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지난 9월15일을 전후해 국내 보수 언론들은 파병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 위해 주한미군 2사단 재배치설을 보도했다. 한국군을 파병하지 않을 경우 현재 재배치를 협의 중인 미군 2사단 병력이 이번 기회에 아예 한국을 떠나 이라크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중앙일보>(9월16일자)는‘(한국의 불참으로) 미국이 자체적으로 추가 파병할 경우 2사단 병력을 차출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정부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함으로써 파문이 일었다.

이 보도가 나간 뒤 여론의 역풍을 의식한 정부 당국자들이 사실 무근이라고 부인하고 나섰지만, 정부 안에서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반발의 징후들이 포착된다. 정부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한 대학 교수는 “정부 내에서 누군가가 그런 얘기를 자꾸 흘리는 것 같다. 철저히 조사해서 밝혀내야 한다. 미국이 그런 이유로 빠지겠다면 우리 스스로 지키면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의 한 관계자 역시 “확인한 결과 그런 사실은 없다고 알고 있지만, 미국이 그런 요구를 해왔다면 말도 안된다. 우리 국민이 그런 협박에 넘어갈 수준은 이미 넘어섰다”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남북한 군축 이뤄 미군 철수시키자”

문제는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올해 들어서만 해도 몇 차례 거듭되었다. 지난 1월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한국민이 원한다면 주한미군을 뺄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자, 주식 시장이 널을 뛰었다. 또 국내에 진출한 미국계 기업들이 럼스펠드 장관 말에 동조하는 듯한 주장을 하고 나서자 경제위기론까지 불어닥쳤다. 미국계 신용평가기관까지 들썩거리자 반기문 외교보좌관이 중심이 된 정부 대표단이 뉴욕의 월가를 찾아가야 했다.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주한미군을 지렛대로 한 미국의 압박은 지난 5월 노무현 대통령 방미 때 절정을 이루었다. 노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하기 직전 미국의 유수 다국적 기업 회장들이 주한미군이 빠지면 자기들도 한국을 떠나겠다고 압박을 가했다는 것이다. 위 소식통은 “미국 정가에서는 노대통령이 워싱턴에 오기 전에 이미 쿠킹(요리)이 다 끝났다는 말이 나돌았다”라고 전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이번 주한미군이동설 역시 근거 없이 나온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 진원지는 미국 국방부이고, 미국 언론계를 통해 ‘작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국 국방부가 자주 쓰는 수법이라는 얘기도 떠돌고 있다.

주한미군을 한국에 대한 압박용 카드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부터 네오콘(미국 신보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연구 검토에서 비롯했다는 관측도 있다. 지난해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한국 사회에서 반미 분위기가 고조되자, 위기감을 느낀 네오콘들이 주한미군철수론을 대응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약도 오·남용을 하면 부작용이 난다.

그 부작용이 벌써 나타나고 있다. 남북한이 군축을 하면 주한미군이 필요없다는 주장이다. 남북간 왕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군비 축소에 합의해 주한미군을 말 그대로 철수시키자는 아이디어가 차츰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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