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시장 경제 ‘궤도 진입’ 청신호
  • 남문희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3.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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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안정·생산 증가 등 ‘7·1 조처 효과’ 잇달아
지난 9월25일, 정부종합청사 브리핑룸에 들어선 정세현 통일부장관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두 가지 ‘반가운 소식’ 때문이었다. 하나는 제8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북측이 전례 없을 정도로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북측이 올해 안에 한 차례 더 상봉을 추진하자고 제의한 것도 이례적이다. 또 한 가지는, 현대아산의 평양 정주영체육관 개관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민간인 천여명이 분단 이래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10월6일부터 9일까지 열리는 이 행사는 말 그대로 획기적이다. 몇몇 당국자나 특수한 경우 아니면 열리지 않았던 군사분계선의 철문이 대규모 민간인 방북자들에게 활짝 열리는 것이다.

통일부 당국자들의 표정이 요즘처럼 밝아 보이는 때는 별로 없었다. 사스로 인한 북한 당국의 방북 불허 조처가 철회된 지난 6월12일 이래 평양을 무대로 한 민간 행사와 학술 행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8월 이후에는 ‘평양 시내에 남쪽 사람이 없을 날이 없을 정도’이다.
통일부의 한 당국자는 최근의 남북 관계에 대해 ‘핵 문제로 인한 대외적 경색 국면과 비교할 때 매우 대조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남쪽뿐 아니라 매우 적극적으로 나오는 북쪽의 태도도 주목할 만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쌀값, 4분의 1로 떨어져

이와 관련해 북한 경제 전문가들은 ‘지난해 7·1 조처의 여진이 다양하게 밀려오고 있다’고 설명한다. 북한 당국은 지난해 7월1일 기존 국영 가격을 농민시장 가격으로 현실화하면서 이에 상응해 임금 인상도 단행했다. 고려대 남성욱 교수는 “7·1 조처 당시 북한 외교관들이 1946년 3월의 토지개혁에 비견되는 조처라고 한 적이 있다”라면서, 그 영향력이 북한 내부뿐 아니라 남북 관계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7·1 조처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몰고 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지난 5월 탈북자를 상대로 함경북도 지역의 물가를 조사한 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농민시장에서 쌀 1kg의 가격이 2백30원으로 나타나 있다. 7·1 조처 이전 근로자 임금을 평균 100원으로 볼 때 농민시장에서 kg당 쌀값은 47원이었다. 한달 월급으로 쌀 2kg밖에 살 수 없었다. 그런데 7월1일 이후 근로자 1인 평균 임금이 2천원으로 올라 kg당 2백30원 하는 쌀을 8kg이나 살 수 있게 되었다. 쌀 가격을 기준으로 했을 때 4분의 1 수준으로 물가가 떨어진 것이다. 대북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조총련의 한 상공인 역시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쌀값을 기준으로 할 때 과거에 비해 단순 금액 대비로 4∼5배 정도 오른 셈인데, 물가가 몇백 배씩 오르곤 하는 다른 제3 세계 국가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성공이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한국은행 북한경제담당 박석삼 조사역은, 국영상점에 비축했던 물자를 농민시장에 풀어놓으면서, 경공업 생산을 늘리고 물가 관리를 철저히 시행했기 때문일 것이라면서도 “여전히 미스터리이다”라고 말했다. 일본 총련이 발행하는 <조선신보>의 평양발 기사는 이같은 의문의 일단을 풀 수 있게 해준다. 올해 3월14일자 강경순 국가가격제정국 종합처장의 인터뷰나 4월1일자 최홍규 국가계획위원회 국장과의 인터뷰 기사를 종합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흐름이 나타난다.

즉 7·1 조처를 통해 채취 공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대폭 올랐고(6천원) 인센티브제가 적용되면서 석탄 생산이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화력 발전이 전 해에 비해 129% 늘고, 공업 생산은 112% 늘었다는 것이다. 농민들에 대한 인센티브제가 효과를 거두어 식량도 현저하게 증산되었다. 핵 문제로 인해 대외 출구는 차단되었지만 대내 개혁이 광범위하게 진행되면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북한 경제 전문가들은 북한의 변화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지난 3월부터 북한 당국이 기존 농민시장을 상설 종합 시장으로 인정하는 조처를 취한 것이다. 남성욱 교수가 지난 7월 평양을 방문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10월까지 평양에 종합 시장 11개가 들어설 예정이다. 고려대 아세아연구소 김연철 교수에 의하면, 시장 확대는 곧 생산 분권화가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공업 상품의 경우 각 기업이 실리 위주로 생산하는 시스템이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로동신문>이 기존 ‘경제 관리 개선 조처’라는 애매한 용어 대신 ‘경제 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현재 북한 내에서 일고 있는 변화가 분명한 방향성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지난해 7·1 조처에 대해 ‘(북이)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고 비유한 김연철 교수는 ‘이제 그 호랑이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고 표현한다. 북한이 시장 경제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돈가뭄 부작용 해소하려고 ‘공채 사업’ 실시

문제는 7·1 조처가 확대되면 될수록 북한 당국의 돈가뭄이 심해진다는 것이다. 7·1 조처의 핵심 내용인 기업과 근로자에 대한 인센티브제는 국가 재정에 귀속되던 기업 소득의 상당 부분이 기업이나 근로자 몫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더군다나 물자 생산을 독려하기 위한 다양한 투자와 물자 수입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올 상반기 해외로부터의 물자 수입은 8억 달러로 지난해 5억9천만 달러보다 35.6%가 늘어났다. 북한 당국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돈가뭄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여러 갈래로 해법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5월부터 시작된 공채 사업이 그 중 하나인데, 이 공채는 대남 관계에 대한 강력한 추동력으로도 작용한다. 대외로 출구가 막힐수록 남쪽 문호는 열릴 수밖에 없다.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있을 핵 및 재래식 무기 협상과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지난 6월9일 조선중앙통신은 이와 관련해 ‘우리가 핵 억제력을 갖추고자 하는 것은 그 누구를 위협 공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망적으로 재래식 무기를 축소하며 인적자원과 자금을 경제 건설과 인민 생활에 돌리려는 데 있다’고 논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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