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북한 전략의 허와 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1999.07.2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산 가족 상봉 등 ‘무거운 주제’ 탈피 필요… 민·관 실무자 조직 통한 ‘경협’ 나서야
7월15일 하루가 덧없이 지나갔다. 정부의 대북 정책 당국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 날 하루를 보냈다. 북측으로부터 새로운 접촉 제의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북측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통일부 당국자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까지도 안온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번 기회가 무산되면 언제 또 접촉이 가능할지 기약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7월 초 재개된 베이징 차관급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기는 했지만 한가닥 희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차관급 회담의 산파역이 되었던 6·3 비공개 합의 때 비료 10만t 추가 지원분을 7월 말까지 보내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아직은 시간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7월 말까지 10만t을 지원하려면 늦어도 7월10~15일에는 회담이 재개되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야 한다. 비료를 취합해 수송하는 데 2주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당국자들이 암묵적으로 설정한 데드라인이 바로 15일이었다.

이산 가족 상봉에 숨은 맹점과 한계

차관급 회담이 결렬된 뒤에도 북한측 수석대표인 박영수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은 계속 베이징에 체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사실이 최근 여러 경로로 확인되었다. 한 기업체 관계자는 “박영수 대표가 평양으로부터 귀환하라는 훈령을 받지 못한 것 같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박영수 대표의 베이징 체류가 차관급 회담 재개와 관련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런 점도 미련을 가지게 한 요소가 되었을 법하다. 그러나 15일이 지나고 17일 현재까지도 북측은 연락 두절이다. 물론 이후로도 제안이 올 수 있으나 장마가 시작되는 8월이면 비료 살포가 어려우므로 비료를 매개체로 한 남북 회담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차관급 회담은 남측이 상호주의를 주장하고 북측이 선 비료 지원을 고집해 깨졌다. 이번 경우에도 비록 서해 교전 사태라는 돌발 상황이 있었기는 해도 또다시 불발로 끝나자 주로 민간의 대북 사업자나 실무자들 사이에는 대북 협상 전략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 개중에는 김대중 정부 들어 첫 대화 주제를 이산 가족 문제로 잡은 것부터가 잘못된 정책이라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된다. 삼성경제연구원 동용승 수석연구원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남북 양측에 부담이 덜한 주제부터 접근했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정책 당국이 김대중 정부의 첫 대화 메뉴로 이산 가족 문제를 설정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청와대 고위 당국자는 “이산 가족 문제는 남북 관계 개선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폭발력 있는 주제다”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또한 지난 85년 성공한 사례도 있어 당국간 접촉에서는 “친숙한 주제이기도 하다”라고 덧붙였다.

이밖에도 새 정부 출범 이후 중국 등 제3국에서 비공개로 상봉하는 사례가 늘고 있고, 특히 올해는 차관급 회담 이전의 비공개 회담에서 북측이 ‘통 크게 해결하겠다’고 공언한 것도 커다란 기대를 갖게 한 요인이다.

실제로 정책 당국은 매우 낙관적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9월에 시범 사업으로 백명 가량 상봉이 이루어지면 올해 매월 50명 단위, 내년에는 백명 단위로 상봉 숫자를 늘려가겠다는 계획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약 7백명 정도를 목표로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목표의 근거는 비료 20만t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7백억원이 된다는 점에 기초하고 있다. 즉 1인당 1억원씩 계산하면 이 정도는 가능하리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회담이 실패한 원인을 서해 교전이라는 돌발적 상황 때문이라고 본다. 물론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간 실무자들 사이에는 이산 가족 문제가 지니고 있는 민감성을 정부가 과소 평가했다는 지적도 많다. 우선 비료 지원과 이산 가족 문제는 협상거리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너무 무겁다는 것이다. 대북 사업에 깊이 관여하는 한 관계자는 “북한 처지에서 이산 가족은 정치 문제고 비료는 생존 문제다. 생존 때문에 정치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사고 방식이다”라고 말한다. 자존심과 체면을 중시하는 북한 특유의 논리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체제가 안고 있는 당면한 위기 의식을 지적하는 인사도 있다. 최근 서울을 방문한 한 재일 동포 사업가는 “북한은 체제에 자신감이 있거나 통제가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에야 이산 가족 문제에 응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현재와 같이 체제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태에서는 대내적인 파급력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산 가족 상봉 문제가 안고 있는 맹점을 지적하는 정보기관 관계자도 있다. 북한 내에 월남 가족을 둔 주민 중 상당수가 그런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 이런 마당에 남측에서 가족 명단을 제시할 경우 인도적 사업이라는 미명으로 북측 가족을 죽이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북에 이산 가족을 둔 남한 가족들이 가장 우려하는 점이기도 하다. 최근의 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남측 이산 가족의 70%가 이런 걱정 때문에 공개적 상봉을 꺼린다고 한다.

사실 민간 실무자들이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산 가족 문제 그 자체가 아니다. 과거와 달리 남북간 접촉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대북 전략만 과거를 답습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사업 영역들을 더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이벤트성 영역에 너무 치중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IMF 이후 대북 경협의 최대 이슈로 떠오른 유휴 설비 북한 반출 문제만 해도 그렇다. 지난해 김대중 대통령이 이 문제의 중요성을 언급한 뒤에 관련 부처들이 부랴부랴 보고서를 작성해 상부에 보고한 뒤에는 진척이 거의 없다. 중소기업청 산하에 ‘중소기업 유휴 설비 해외 투자지원반’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지난 5월 한 차례 간담회를 열고는 그만이다.

민간 대북 사업 실무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정책 당국에 짜증이 나 있다. 예를 들어 통일부의 경우 현안이 있을 때마다 기업의 대북 실무자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한다. 문제는 이런 자리를 통해 여러 가지 제안이 나와도 실행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기업 관계자들이 “통일부가 무슨 연구소냐? 매번 연구만 하고 있게”라고 볼멘 소리를 한다.

통일부는 통일부대로 할 말이 많다. 대북 경협을 힘있게 추진하려면 경제 부처들과 손발이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산업자원부에 ‘남북교역반’이라고 해서 특별 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은 일을 하기 위한 조직이라기보다는 다른 부서로 이동하기 전에 3개월 정도 머물렀다 가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고위급 회담’보다 ‘과장급 회담’이 효율적

대북 정책의 총괄 사령탑이라 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이나 통일부 고위직에 경제 전문가가 없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그러다 보니 머리로는 경협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실제 정책은 추상적 수준에 머무르는 폐단이 있다. 물론 정책 당국도 이산 가족 문제를 대북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산 가족 문제를 징검다리로 삼아 남북 간의 연락 기능을 상설화하고, 기본합의서에 따른 각종 공동위원회를 가동한 뒤 고위급 회담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민간 전문가들이 지적한 대로 이산 가족 문제를 북측이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다른 현안들 역시 지연될 수밖에 없다. 또 이같은 목표 설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부 대북 전략의 특성은 고위급 회담 위주, 그리고 큰 이슈 위주로 추진되고 있는데, 이런 방식은 현재의 남북관계 상황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업체 관계자들은 책임 있는 당국자가 만나서 남북관계를 하루아침에 개선하겠다는 것 자체가 과거 지향적 정책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유형보다는 오히려 구체적 사업 구상을 가지고 실무 책임자들이 만나서 협상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휴 설비 문제를 담당하는 통일부의 담당 과장과 북한측 실무 과장이 베이징에서 회담하는 것이 일을 추진하는 데 훨씬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북간 경제 협력이 시대의 과제로 제시되고 있는 시점에는 그에 맞는 새로운 협상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 민간 실무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경협 시대에 맞는 접근 방식이란 다양하게 산재된 경협 구상들을 종합적·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경협 과정에 종사하는 민간 실무자들의 풍부한 현장 감각을 정책에 적극 반영하는 것이다.

포용 정책, 내용과 조직 빈곤

이를 위해서는 민과 관, 그리고 정부내 각 부처 실무자들로 구성된 특별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올해 초 대북 사업에 종사하는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한 정책 제안서를 당국에 제시한 바 있다. 이 제안서의 핵심은 지난해의 경우 금강산 관광으로 대화의 물꼬가 트인 만큼 올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무 영역 별로 북측과 접촉 라인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현재 대북 정책에서 고려해야 할 실무 영역으로 비료 지원, 농업 협력, 유휴 설비 지원, 남북협력기금 사용, 공단 개발, 기업의 설비 기술 지원, 수송망 확보, 투자 보장, 인적 교류 등 9개 영역으로 구분했다. 그는 자기가 내놓은 제안의 핵심은 이같은 9개 영역이 개별적으로 진행되어서는 안된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럴 경우 ‘약발’만 소진될 우려가 있으므로 종합적·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특별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별 조직과 관련해 삼성경제연구소의 김연철 수석연구원은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직속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산하에 둘 필요도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산하에 통일부·산자부·재경부 등 각 부처 경협 실무자들이 중심이 된 팀을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로를 통해 민간 기업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현장 감각을 수용해 정책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서해 교전 사태, 차관급 회담 결렬, 북한의 미사일 재발사 움직임 등으로 인해 포용 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는 여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포용 정책 자체가 아니라 그 정책의 내용과 조직이 빈곤하다는 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