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차관급 회담 ‘열매’ 맺을까
  • 김연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9.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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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차관급 회담 전망/대화 형식·주변 여건 좋아 ‘성과’ 기대할 만
98년 베이징 비료 회담이 실패한 이후 1년 2개월 만에 남북한 차관급 대화가 열린다. 93년 북한 핵문제가 발생한 뒤 교착되어 온 시간만큼 신뢰를 회복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99년 2월 북한이 조건을 붙여 고위급 회담을 제안한 뒤 지속된 신경전이 막을 내린 것이다.

이번 합의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남북기본합의서 국면을 복원하는 것이다. 사실 ‘한반도의 봄’으로 기억되는 90∼92년 고위급 회담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은 이제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김영삼 정부의 ‘5년 공백’이 너무 길었지만, 우리는 남북합의서의 그 믿기 어려운 구절들이 7년 전 합의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6월20일 열리는 차관급 회담은 7년이라는 공백을 메우면서 새 천년에 도약하기 위한 전진이 되어야 한다.

98년 4월이 실패한 탐색전이었다면, 99년 6월은 성과 있는 대화가 될 것이다. 첫째, 이번 회담은 남북 회담의 정석을 따르고 있다. 비공개로 접촉해 어느 정도 원칙적 합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역사적 남북 회담은 비공개 접촉에서 대략 합의를 도출하고, 이를 공개 회담에서 발표하는 형식을 취했다. 닉슨의 미·중 데탕트를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72년 남북공동성명이 그랬고, 90년 고위급 회담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 불신과 여론의 압박을 고려할 때, 공개 회담에서 상호 입장 차이를 조율하기는 그만큼 어렵다. 98년 비료 회담이 실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호 입장 차이를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에서 남측 여론과 북측 자존심이 협상을 제약했다.

둘째, 정부는 이번 회담을 1회성이 아니라 장기적인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대북 정책 원칙의 하나로 주장되던 상호주의 문제를 신축적으로 재해석했다. 98년 회담은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와 비료 제공을 연계하는 상호주의 원칙을 고집하는 바람에 결렬되었다. 이번에는 비료를 우선 제공하고(6월20일까지 10만t, 7월 말까지 10만t), 이산가족 문제를 나중에 협의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산가족 문제 또한 난이도를 구분해 우선 교환 방문 등 ‘시범 사업’을 합의하고, 더 어려운 면회소 설치 문제 등은 나중에 협의하는 방식을 택할 예정이다. 회담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두어 초반부터 쟁점을 부각하기보다는 실현 가능한 현안을 합의하면서 다단계 회담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차관급 회담→고위급 회담(총리급 혹은 장관급)→정상 회담 순서를 고려하고 있다.

셋째, 북한에 대한 포괄적 접근안이 추진되는 주변 여건도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남북 관계 개선은 포괄적 접근안의 핵심 내용이어서 미국과의 협상을 앞둔 북한 처지에서 중요한 카드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통미 봉남(通美封南)’이라는 몰역사적이고 기괴한 개념으로 북한의 대외 정책을 분석한다. 즉, 북한이 미국하고만 대화하고 한국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는 김영삼 정부 시기 ‘공백의 5년’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만 해당하는 말이다. 남북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간 김영삼 정부의 일관성 없는 대북 정책이 결국 한국을 배제하는 원인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에 비해 김대중 정부는 봉쇄 대신 포용을 선택했다. 또한 북한에 대한 포괄적 접근을 통해 소극적 자세를 보이는 주변국과의 공조를 주도하고 있다. 북한이 포괄적 접근안을 받아들인다면 남북 대화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b>DJ와 김정일, 무엇을 원하나

그러면 차관급 회담에 임하는 남북한 정부는 어떤 의도를 갖고 있을까? 김대중 정부는 회담 수준을 점차 격상시키면서 남북합의서 국면을 복원하고, 나아가 냉전 구조를 해체할 실질적 협의를 기대하고 있다. 냉전 구조 해체는 남북기본합의서와 그 부속 합의서 3개만 제대로 실천하면 가능하다. 남북한은 이미 어떤 현안(부속 합의서 내용)을 어떤 절차(공동위원회)를 통해 해결할지 합의한 바 있다. 상호 신뢰만 확인된다면, 90년부터 2년 동안 진행된 기나긴 신경전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불필요한 명분 경쟁을 건너뛸 수 있는 것이다. 남북한 당국자간 관계가 정례화하고, 현안 문제 협의가 시작되면 우선적으로 교류 협력 부속 합의서 내용을 검토할 수 있다. 정치·군사 문제에 대한 남북한의 입장 차이를 고려할 때, 경제 협력 문제는 상호 호혜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북한은 어떤가? 북한은 98년에도 그랬지만, 한국의 지원을 원한다. 일단 비료가 부족하다. 북한의 연간 비료 필요량은 1백60만t이지만, 실질 생산량은 60만t 정도이다. 과거 북한의 연간 비료 생산 능력은 2백60만t 가량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경제 위기로 비료 공장 가동률이 20∼30%에 머무르고 있다. 국제 사회 지원분(29만t)과 중국 지원분(20만t)을 고려하더라도 50만∼60만t이 부족하다. 북한의 ‘부족한 경제’ 구조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대외 식량 의존 규모는 연간 백만t에 이른다. 한국 기업이 거의 참여하지 않은 나진·선봉에 대한 외자 유치는 실패했다. 경제 현대화를 기획하는 북한 처지에서 남북 관계 개선과 남북 경제협력 확대는 불가피하다. 김대중 정부의 북한 포용 정책 목표가 바로 ‘북한이 평화를 보장한다면, 한국은 경제적 공영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남북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구조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회담 성과는 상호 신뢰하는 수준만큼만 나타날 것이다. 사실 남북 관계에서 공백의 5년 동안 불신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얼마만큼 빨리 90년대 초반 수준의 신뢰를 회복하느냐가 회담을 위한 회담과 대화를 위한 대화의 시간을 줄일 것이다.

이번 회담이 실질적 냉전 구조를 해체하는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회담은 지속되어야 한다. 한 번에 돌파를 기대하기보다는 작은 합의를 통해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시간의 한계는 있다. 2000년 한국 총선과 미국 대선이라는 불투명한 국면이 오기 전에 포괄적 접근의 제도적 정착이 요구된다. 특히 미국의 소극성이 98년 교착 위기를 가져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초조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급할수록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번 회담이 성사되는 과정에서, 비공개 접촉에서 이룬 합의서가 서명되기 전에 공개되는 조급함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

둘째, 국제적인 지지를 계속 얻어야 한다. 이제 북한 문제는 당사자 관계와 국제화 구도의 양자 택일이 아니다. 단기적으로 선후 차가 있을 수 있겠으나, 중장기적으로는 한·미·일 3국의 호흡이 중요하다. 미·일은 남북한의 독자적인 대화 채널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미·일 양국과 북한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남북 관계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북한 정책의 목표가 남북 관계 개선을 넘어서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냉전 구조 해체할 출발점에 서다

셋째, 공개· 비공개 접촉을 병행해야 한다. 합의하기 어려운 현안은 공개 회담을 통해 결코 해결 할 수 없다. 특히 회담의 지속성이 제도적으로 정착되기 전까지 공개 회담과 더불어 비공개 접촉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

넷째, 북한 정책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남북 관계 개선이 절박한 한반도 정세의 특성을 여전히 과거의 잣대로 보는 일부 정치 세력과 다수의 비관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북한 정책의 동력이 정치적 지지도를 반영한다고 볼 때, 포용 정책의 국면적·시대사적·국제적 불가피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차관급 회담은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의 먼 여정에서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기나긴 경주에서 좌절과 후퇴를 여러 번 겪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용 정책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라는 점이 다시 한번 강조될 필요가 있다. 한반도는 새로운 천년이 오기 전에 냉전의 긴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오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탈냉전의 빛이라도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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