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 빅카드 ‘월드컵 분산 개최’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0.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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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축구협회 회장 물밑 작업 진행중…북측도 찬성할 가능성 높아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2002년 월드컵 대회 남북 분산 개최 및 단일팀 구성을 위한 움직임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대한축구협회(회장 정몽준) 등 유관 단체들이 정상회담 의제에 이 문제를 포함해 달라고 다양한 통로를 통해 정부에 건의하고 있다. 담당 부처인 문화관광부 역시 정상회담 이후 예상되는 남북 체육회담 때 실무적 합의를 본다는 목표를 정하고 준비 작업을 진행 중이다.

월드컵 분산 개최를 위한 주변 환경 역시 상당 부분 정비되었다. 특히 지난 5월16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집행위원회에서 올해 10월 레바논 아시안컵 대회에 남북이 단일팀으로 출전하는 것을 승인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면서 전망이 한층 밝아졌다. 아시안컵 단일팀 출전 문제는 그동안 축구협회가 월드컵 분산 개최 및 남북 단일팀 구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추진한 1단계 사업이라 할 수 있다. 즉 10월 아시안컵대회에 단일팀으로 출전하고, 내년에 국제축구연맹(FIFA) 주최로 두 차례 열릴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역시 단일팀으로 출전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해 간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정몽준 회장이 단일팀 문제에 대한 아시아축구연맹의 승인을 이끌어내고 귀국한 직후 대한축구협회는 남북 월드컵 분산 개최 및 단일팀 구성 문제를 검토한 보고서를 청와대 문화체육담당 비서관에게 제출했다. 축구협회가 제출한 이 보고서는 현재 대북 협상 전략을 총괄하는 정부 부처에 이관되어 검토되고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월드컵 분산 개최는 이미 국제축구연맹도 양해했고 정부도 희망하는 사안이다. 남은 것은 북한측 반응이다”라고 밝혔다.북측, 통신·숙박 시설 지원 전제로 수락할 듯

현재 북측의 반응과 관련해 정부가 예의 주시하고 있는 부분은 북측이 분산 개최에 따른 부담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해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정부 산하 월드컵 관련 단체의 고위 관계자는 의미 심장한 발언을 했다. 즉 남북이 이미 이 문제를 검토해 왔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통신기자재 및 숙박 시설 등 일부 사회간접자본 지원을 전제로 북측이 이를 극적으로 수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동안 축구협회 등 관련 단체는 우리측에 할당된 게임 중 1∼2개를 북한에서 치르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북측은 지난해 11월 정몽준 회장 방북 때 “국제 대회에 남북이 ‘유일팀’으로 나가는 것이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다”라고 원론적 입장을 밝힌 바는 있으나 구체적인 답변은 미루어 왔다. 특히 지난 4월 정몽준 회장과 블래터 국제축구연맹 회장 방북이 추진되기도 해 기대를 모으기도 했으나 북한측이 ‘아직 선물이 준비되지 않았다’며 연기를 요청해 수면 아래로 잠복해 있었다.

그동안 북한측은 수많은 보도진 및 관광객에게 평양을 전면 개방하는 데 따른 부담감과 통신 및 숙박 시설 등 인프라 문제 때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최근에는 북한측 태도 역시 매우 전향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조짐이 감지된다.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해외의 한 동포 학자는 전화 인터뷰에서 ‘월드컵 분산 개최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측이 가장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안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상회담 직전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북한 소년학생궁전 및 평양 교예단 공연 등을 지적하며 “월드컵 분산 개최 역시 문화 예술 스포츠 등 비정치 분야 교류의 일환이라는 관점에서 북측이 응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밝혔다.

북한측이 적극적으로 나올 수 있으리라고 보는 이유 중의 하나로 지난해 이후 북한 수뇌부가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거론되기도 한다. 북한은 이미 1989년 세계청년학생 축전을 치렀고, 또 앞으로 2년이라는 기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개방에 따른 문제 역시 걸림돌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지적이다. 월드컵 유관 단체의 고위 관계자 역시 “평양대회에 참석할 국제축구연맹 요원이나 보도진 및 관광객 수를 적절하게 조정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견해이다.정상회담 이후 남북 체육회담 열릴 예정

그동안 월드컵 분산 개최 문제의 대외 창구는 정몽준 축구협회 회장이었지만 정부 내부에서는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이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이를 총괄해왔다. 박장관이 정상회담에서 정부측 밀사로 활약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남북 간에 이미 상당한 교감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최근 문화관광부는 산하 유관 단체들에게 ‘정상회담 이후 남북 체육회담에서 이 문제가 실무적으로 거론될 예정’이라고 비공식으로 통보했고, 관련 단체들 역시 이에 따른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의 공식 수행원 명단에 정몽준 회장 또는 박지원 장관이 포함될 가능성이 거론되는 점도 월드컵 분산 개최가 타결될 전망을 밝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정상회담에서 월드컵 분산 개최 및 남북 단일팀 구성이 합의될 경우 그것이 가져올 상징적 효과는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남북 정상회담 추진실무팀 주변에서 최근 흘러나오는 얘기에 따르면, 남과 북은 이번 회담에서 ‘평화선언’을 채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또한 평화선언 내용을 구체화하기 위해 남북 기본합의서에서 이미 합의한 공동위원회 체제로 남북 관계를 전환해 간다는 합의를 이룰 가능성도 매우 높다.

이런 골격 위에 남과 북이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 공동 개최에 합의할 수 있다면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는 한층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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