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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소년들 “텔레비전밖엔 난 몰라”

“바깥 세상은 위험” 부모가 외출 막아… 방안에서 TV 시청·게임 몰두

런던·韓准燁 편집위원 ㅣ 승인 1999.04.22(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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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영국 청소년의 일상 생활을 온통 지배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식사 시간과 숙제할 때를 빼놓고는 마치 침실에 갇힌 죄수처럼 방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다. 가족간 대화, 외부 세계와의 접촉도 아예 없다. 심할 땐 하룻밤에 무려 7시간이나 자기 방에서 텔레비전만 벗하면서 살아간다….’

이는 런던 정경 대학(LSE) 사회 심리학과 부설 미디어연구소가 3월18일 뉴미디어 시대를 사는 어린이와 청소년(6∼17세)들의 전자 매체 이용 실태에 대해 발표한 보고서 내용 가운데 한 대목이다. 이 보고서가 나오자 영국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 청소년들의 텔레비전 시청 및 컴퓨터 게임 중독 사례와 후유증을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과다한 폭력과 섹스가 넘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컴퓨터 게임, 그리고 제어 장치 없는 인터넷에 빠져들어 ‘침실 죄수’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언론의 공통된 지적이다.

‘베드룸 제너레이션’ ‘베드룸 컬처’ 새 용어 등장

소니아 리빙스턴 교수가 주도해 런던 정경 대학 연구진이 지난 1년 동안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8개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번 연구 조사는 새로운 미디어 용어 ‘베드룸 제너레이션’ ‘베드룸 컬처’를 등장시켰다. 영국 언론이 큰 관심을 갖고 일제히 보도한 미디어 보고서 <어린이 및 청소년, 그리고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청소년의 텔레비전 및 컴퓨터 접촉·이용 실태를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 결과이다.

이 보고서는 미디어 리서치의 각종 의견 수렴 방법을 동원해 국가별·성별·연령별·계층별 청소년들의 미디어 보유·접촉·이용 현황을 과학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의 청소년 문화를 심층 분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미디어 보고서가 특히 영국 사회에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영국 청소년들이 텔레비전과 컴퓨터에 매달려 있는 시간이 무려 2∼3배나 길며, 집 밖에서 적당한 오락 및 휴식 시설을 찾지 못한 채 어릴 때부터 늘 침실에 갇혀 지내고 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지난 10년간 영국 청소년들이 가정 밖에서 타인과 접촉하거나 체육과 클럽 활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침실에서 각종 전자 매체로 자기만의 성을 쌓아 왔다고 지적하고, 더 늦기 전에 가정·학교·지역 사회·국가가 베드룸 제너레이션의 베드룸 컬처에 관한 문제점을 논의하고 새로운 미디어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베드룸 제너레이션의 베드룸 컬처가 왜 부모들에 의해서 조장되고 있는가? 런던 정경 대학의 미디어 보고서는 학교를 포함한 가정 밖의 세계에서 폭력·섹스·마약 따위 범죄가 청소년들을 유혹하며 생명을 위협한다는 부모들의 우려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영국의 경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강력 범죄 발생률이 지난 10년 사이에 2배로 증가해, 자녀들의 집 밖 외출과 여가 활동을 안전하다고 보는 부모는 영국 전체 가정의 11%에 지나지 않았다. 납치·성폭행·살해 등 집 밖에서 일어나는 신체적 위해와 마약 등 범죄 유혹를 두려워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을 집안에 묶어 두고자 하며, 이에 따라 부모들 자신이 각종 첨단 전자 매체 구입을 권유해 베드룸 컬처를 조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영국 청소년들의 첨단 전자매체 보유 현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청소년의 21%가 VCR를 보유하고, 60% 이상이 컴퓨터 게임을 즐기고 있으며, 36%가 퍼스널 컴퓨터를, 68%가 퍼스널 스테레오를 갖고 있다.

영국에서 이제 텔레비전은 가족 구성원을 안방에 모이게 했던 공동 매체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지 오래이다. 영국 어린이와 청소년의 3분의 2가 자신의 침실에 자신만의 텔레비전을 갖고 있으며 특히 노동자 계급 가정 출신 청소년은 4분의 3이 개인용 텔레비전을 보유하고 있다. 놀랍게도 6∼7세 어린이까지도 50%가 자신의 침실에 텔레비전을 갖추고 있다.

이에 반해 다른 유럽 국가들의 어린이들은 아직도 대부분 가족이 공동으로 시청하기 때문에 프로그램 선택에 부모의 간섭이나 지도를 받고 있다. 영국이 아닌 나라에서 6∼7세 어린이의 자기 침실내 텔레비전 보유율은 덴마크가 33%로 가장 높고, 스웨덴 26%, 독일 17%, 프랑스 16%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 청소년들의 텔레비전 평균 시청 시간도 1백47분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길다. 독일·프랑스 청소년들은 하루 평균 시청 시간이 1시간 미만이며, 영화 연극 관람 등 문화 생활과 수영 등 체육·유스 클럽 활동에 여가 시간을 대부분 활용하고 있다.

이 미디어 보고서는 텔레비전 프로와 광고의 폭력성·선정성, 음란 비디오와 폭력 컴퓨터 게임의 유통과 관련해 건전 프로그램을 촉구하는 민간 감시 기구 및 시청자 권익 옹호 단체들의 주장에도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청소년들의 텔레비전 시청 행태, 책보다는 컴퓨터 등 전자 미디어를 통해 교양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현상이 처음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Yes’ 독서는 ‘No’

현재 영국 청소년의 3분의 1이 부모들의 규제와 간섭을 받지 않은 채 시청 허용 마감 시간대인 밤 9시를 넘기는 것은 말할 것 없고, 6~7세 어린이들까지도 심야 성인용 프로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 또 가정의 텔레비전 보유율이 100%인 데 비해 활자 매체인 책, 특히 청소년을 위한 각종 교양 및 문학 서적을 보유한 가정은 87%로 나타났다. 영국 청소년이 학습 목적이 아닌 취미·교양으로 독서하는 시간은 텔레비전 시청 시간의 10분의 1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조사 결과, 영국 어린이의 3분의 1이 자신의 침실에 교양 서적을 상비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 이유는 ‘교양 서적을 읽는 것은 시대에 뒤지며, 지루하고 흥미없고 때로는 힘이 들어 좌절감을 느낄 정도의 따분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컴퓨터는 텔레비전과 함께 베드룸 컬처를 받치는 양대 기둥을 이루고 있다. 영국 가정의 67%가 컴퓨터 게임 기계를 보유하고 있으며, 어린이의 64%가 폭력성이 강조된 각종 컴퓨터 게임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게임용이 아닌 개인용 컴퓨터 보유율은 전체 청소년의 12%에 불과하다(가정내 보유율은 53%). 이는 유럽내 개인용 컴퓨터 보유 선두국인 덴마크(63%), 스웨덴(55%)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같은 실태가 드러나자 청소년 문제 관련 단체와 시청자 보호기구들은 방송 프로그램 질 향상과 정부의 방송 정책 검토를 촉구하고 나섰다. 리버풀 대학 발레리 알톤 교수는 “자녀들을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침실, 즉 스스로 만든 감옥 속에 묶어두는 것은 폭력·범죄·마약·음란물이 넘쳐 흐르는 거리에서 청소년들을 범죄자나 성도착증 환자 앞에 내버려두는 것과 다를 바 없다”라고 지적했다.

노팅엄 트렌트 대학의 심리학 교수 마크 그리핏 박사도 청소년들의 컴퓨터 게임 중독이 빚는 문제점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청소년 사이에 마약 중독과 비슷한 욕지기·발한·허탈 등 금단 증상과 강박 증세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청소년 및 가정 문제 관련 단체들은 영국 기업들의 텔레비전 광고료가 연간 50억 파운드에 이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광고가 청소년의 사고와 정서에 미치는 부작용도 신중히 검토할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미디어 보고서를 책임 집필한 소니아 리빙스턴 박사는 텔레비전에 대한 윤리 도덕주의론자들의 경고와 비판에 견해를 달리한다. “이번 조사는 청소년과 텔레비전 및 전자 매체의 관계에 관한 토론에 바람직하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실증적인 측정이 불가능한데도 텔레비전 범죄 모방 및 폭력성 유발 등 텔레비전과 컴퓨터 게임의 역기능과 부정적인 영향만을 크게 부각해 도덕적 공황과 우려를 불러 일으키려는 사람들에게 공격할 무기를 제공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리빙스턴 교수의 이같은 견해는 텔레비전과 컴퓨터의 역기능을 부각하는 비판론자의 도덕적 공세를 겨냥한 것이다.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증가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영국 청소년들이 소파에 파묻힌 채 텔레비전에 온통 정신 팔린 수동적 시청자(couch potato)가 되고 있다거나, 창조적인 면에서 기성 세대에 뒤지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보고서를 토대로 새로이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청소년 세대의 성장과 사고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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