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종군 위안부 위로금 기습 지급 배경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1997.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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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1월14일.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을 3일 앞둔 그 날,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위안소 설치에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자료가 발견됨에 따라 일본 정부는 ‘군이 관여한 사실’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하게 되었다. 당시 양국의 언론계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의 돌연한 태도 변화에 정치적 음모가 숨겨져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일본군이 관여한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1건도 없다고 잡아떼던 일본 정부가 정상회담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 백기를 든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후인 지난 11일. 일본측은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제2의 기습 작전을 강행했다. 한국 정부와 관계 단체에 미리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한국인 종군위안부 7명에게 위로금을 지급한 것이다.

일본측은 왜 하필이면 정상회담을 2주일 앞둔 시점에서 이같은 기습 행위를 저질렀을까.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 방한 단장 가네히라 데루코(金平輝子) 이사를 직접 만나 보았다.

도쿄도 부지사를 거쳐 현재 도쿄도 역사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가네히라 단장에 따르면, 지난 11일 프라자호텔의 전달식에 참석한 일본측 관계자는 모두 6명이다. 가네히라 이사를 포함한 기금측 이사 4명과 사무국 직원 2명이 박복순 할머니(75) 등 5명에게 하시모토 총리의 사죄 편지, 하라 분베이(原文兵衛) 이사장의 인사장, 위로금 1인당 2백만엔과 3백만엔 상당의 의료 복지 서비스 등을 약속하는 문서를 전달했다고 한다. 나머지 두 할머니에게는 자택을 직접 방문해 똑같은 문서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네히라 이사의 말로는, 기금측이 서둘러 한국을 방문한 것은 지난 12월16일 서울의 박복순 할머니로부터 위로금을 수령하겠다는 편지가 도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어 24일 나머지 6명으로부터 똑같은 의사 표시가 문서로 도착했다고 한다. 아시아여성기금측 주장을 액면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편지가 도착한 지 2주 만에 치러진 전격 작전임에는 틀림없다. 아시아여성기금측은 왜 그런 두더지 작전이 필요했던가.

2년 전 7월 무라야마 내각에 의해 민간기금 형태로 발족한 아시아여성기금은 96년 8월15일을 위로금 지급 개시 예정일로 정하고 그동안 4억7천만엔에 달하는 기금을 모아왔다. 그러나 주 사업 대상 지역인 한국·대만·필리핀 등지의 종군위안부 및 관계 단체가 △일본 국회의 사죄 결의 △관련자 색출과 처벌 등을 요구하며 위로금 수령을 거부함에 따라 사업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기금 관계자 “정부가 보상 않으니 차선책이라도”

종군위안부 1백7명이 등록하고 있는 필리핀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아시아여성기금은 작년 8월13일 마닐라 영자지에 위로금 지급 사업 개시를 알리는 광고를 냈다. 이튿날 3명이 종군위안부로 인증되어 위로금을 받았으나, 대다수 종군위안부들은 일본 정부의 직접 보상을 요구하며 이 광고를 무시했다. 심지어 위로금 수령을 수락한 3명마저 돈을 받은 직후 기자회견을 갖고 ‘위로금 수령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보상 청구는 별개 문제’라고 지적하여, 일본 정부 직접 보상 요구를 관철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했다.

이런 우여곡절 때문에 아시아여성기금의 위로금 수령자는 사업 개시 반 년이 지난 96년 말 현재 9명(모두 필리핀 여성)밖에 안되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한국(1백58명), 대만(33명), 필리핀(1백7명), 북한(2백60명) , 중국(11명), 말레이시아(8명), 인도네시아(6천5백8명) 등지의 종군위안부 전체 인원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이다.

종군위안부 피해 여성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가 니시노 루미코(西野王留美子)씨는 한국에서의 기습 행위가 아시아여성기금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만용이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반 년이 넘도록 별다른 지급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던 기금측이 종군위안부의 진원지인 한국에서 지급 실적을 냄으로써 종군위안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아시아여성기금측 일부 이사들이, 서울에서의 두더지 작전이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고 ‘이로써 종군위안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라고 쾌재를 불렀다는 소문이 이를 잘 뒷받침한다.

아시아여성기금의 발기인으로 이 기금 운영에 깊숙이 개입해 온 도쿄 대학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도 기금이 처해 있는 ‘절박한 처지’를 부인하지 않았다. 와다 교수는 가네히라 이사와 동석한 자리에서, 일본 정부의 직접 보상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볼 때 차선책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운을 띄웠다.

그는 “자민당 단독 정권 복귀 등 일본 국내 정치 상황으로 보아 최소한 10년 안에 일본 정부가 직접 보상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은 매년 나이를 먹어간다. 위로금을 받은 필리핀 종군위안부 9명 중 그 사이 2명이 사망했다. 한국에서도 20여 명이 사망하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기금 사업은 이제 시간과의 전쟁이다. 따라서 위로금 지급 신청이 들어오면 즉각 지급한다는 것이 기금측 기본 방침이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신청이 들어오면 똑같은 방법으로 신속히 대응하겠다”라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한파 지식인이다. 재일 동포 법적 지위 향상 운동에도 깊이 관여해 왔고, 무라야마 전 총리가 ‘일본은 한반도 분단과 무관하다’라고 한 국회 답변이 문제가 되자 <아사히 신문>에 ‘한반도 분단은 일본에도 책임이 있다’라는 칼럼을 기고한 바 있다. 그러한 연유로 위로금 지급 시기를 놓고 상당히 고민했다는 것이 와다 교수의 고백이다. 그는 왜 하필이면 정상회담 직전에 강행 돌파를 시도했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정상회담과 될 수 있는 한 시간을 두려다 보니 1월 초로 앞당겨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관계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이런 강행 돌파에는 일본측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음이 분명하다. 일본 정부는 96년 3월 국제노동기구(ILO) 전문가위원회, 8월 유엔인권소위원회 등이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국가 보상을 실시하라는 권고를 내리자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더욱이 96년 말에는 미국 사법 당국이 종군위안부 관련자와 인체 실험을 자행한 731부대 관련자 16명에 대한 미국 입국 불허 조처를 내림에 따라 국제 사회에서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국내외 압력 해소 위한 실적 올리기인 듯

한편 일본 국내에서는 자민당 단독 정권 등장과 함께 역사 교과서 개정 운동,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운동이 큰 힘을 얻고 있다. 게다가 종군위안부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움직임도 거세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국내외에서 가해지는 이런 상반된 압력을 일거에 해결하는 방법으로 종군위안부 진원지인 한국에서 실적을 쌓으려 서둘렀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이는 2주일 앞으로 다가온 정상회담의 성공보다는 일본의 도덕성을 어필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두었다는 얘기이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일본측의 기습 작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유종하 외무부장관이 한국 외무부장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 보상’을 언급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실타래처럼 얽혀 가는 종군위안부 문제에 과연 종착역이 있을까.
변호사 도쓰카 에쓰로우(戶塚悅朗)씨는 <일본의 논점 97>이라는 책에서 ‘종군위안부에 대한 보상은 일본 정부가 직접 실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48년 바타비아 군사 재판을 예로 들었다. 일본군은 42년 2월 하순 인도네시아 각지의 수용소에서 네델란드 여성 35명을 차출해 4개 위안소에서 위안부로 부려 먹었다. 패전 후 일본인 12명이 바타비아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1명이 사형, 8명이 유기 징역에 처해졌는데, 당시 일본 정부는 이같은 판결을 선선히 받아들인 전례가 있다.

도쓰카 변호사는 똑같은 행위에 대해 아시아인에게 가한 것은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기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후보상특별법’과 같은 특별 입법을 통해 정부가 보상하는 길밖에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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