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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태인 두번 죽이다

무덤 훼손 등 ‘반유태 전염병’ 번져…인종차별주의 위험 수위 넘어

스트라스부르·류재화 통신원 ㅣ 승인 2004.06.01(Tue)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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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나라 이스라엘은 어느 나라를 가장 싫어할까. 바로 프랑스다. 이스라엘에서 나온 몇몇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스라엘 국민 70%가 결코 프랑스를 좋아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스라엘 국민 85%는 프랑스 정부는 물론이고 프랑스인 대부분이 친팔레스타인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에는 전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유태인 수가 많다. 그런 프랑스가 왜 반유태주의 국가로 낙인 찍히게 되었을까. 노골적인 반유태주의 감정은 프랑스 이슬람계 이민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의 무의식적인 집단 감정도 무시하지 못한다. 프랑스인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강경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지, 유태인을 무턱대고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민족적 편견과 정치적 비판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에서 몇몇 불미스런 사건이 불거지면서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반유태주의 논쟁이 재점화했다.

지난 4월30일 새벽 프랑스 알자스 지방 콜마르 근처의 작은 마을 헤를리슈하임에서 유태인 공동 묘지가 크게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백27기의 무덤 비석들은 온통 SS 나치 마크와 ‘민족 제국 총통’을 뜻하는 나치당 표어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유태인 단체들은 ‘치가 떨리고 소름 돋는 일’이라며 분노했다. 시라크 대통령과 정치권도 ‘결코 용인할 수 없는 혐오스러운 만행’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슬람인 무덤도 자주 공격당해

알자스 지방 수사 당국은 신나치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보고 인근 독일 경찰과 함께 수사하고 있다. 이 사건 하나만으로 프랑스에 신나치주의가 부활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극우 세력이라면 치를 떠는 프랑스인들에게 이 사건은 자극적이었다. 이후 정부는 긴급 국무회의를 열었고, 내무장관은 프랑스에서 자행되고 있는 반유태주의 폭력 및 범죄 사건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덤 훼손 사건은 독일과 인접한 우파 우세 지역인 알자스 지방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반유태주의 관련 사건의 75%는 파리와 파리 근교에서 일어난다. 프랑스 국가인권자문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00년 10월 팔레스타인의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독립운동) 때 파리 근교에서만 한 달에 1백10건의 유태인 폭행 및 건물 습격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20여 건으로 줄어들었다가 2001년 9·11 테러 직후 63건으로 증가했고, 2002년 4월 이스라엘의 ‘성벽 작전’ 때에는 1백3건, 지난해 4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에는 63건, 그리고 올해 초 67건을 기록했다.

그러나 유태인들만 수모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인들의 무덤 또한 공격당하는 일이 잦다. 인종차별주의 혹은 외국인 혐오증에서 촉발된, 이슬람계 이민자를 대상으로 한 폭행 및 범죄 사건도 지난해에 92건이 접수되었다. 유태인들의 집회 장소는 불타고, 유태인 사립 학교와 이슬람계 공립 학교가 이웃한 동네에서는 아이들의 패싸움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최근 악화하는 중동 정세 탓에 프랑스에 이른바 라시즘(인종차별주의)이라는 ‘어둡고 음습한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언론들은 흔히 ‘만성화한 증오’ ‘출구 없는 공방전’ ‘씹고 싶어 참을 수 없는 욕망’ 같은 표현을 써가며 새로운 라시즘 전염병이 프랑스에 돌고 있다고 진단한다. 모두가 겉으로는 ‘안티라시즘’을 외치지만, 토론을 거듭하다 보면 인종 차별적 발언이 나오고야 만다는 것이다. 카페와 술집에서 벌어지는 정치 토론에서는 흔히 이스라엘 샤론 총리를 비판하다가 이스라엘 국가를 비난하게 되고, 마침내 이스라엘인도 아닌 유태인까지 모두 싸잡아 비난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프랑스 학자들은 최근 몇 년 사이 프랑스인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유태인은 이스라엘인, 아랍인은 팔레스타인인’이라는 공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더러운 이슬람놈’ 하면 안 통하지만, ‘더러운 유태인’ 하면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안티세미티즘(반드시 유태인을 지칭하지는 않지만 보통 반유태주의로 통한다)은 곧바로 유태인을 공격하는 말이 되기 십상이다.

50만명에 이르는 프랑스 유태인 가운데 유태인적 정체성으로만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 유태인이지만 정치적 입장은 친팔레스타인주의자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극단적 분파주의와 인종적 편견이 횡행하면서 서로를 헐뜯는 위험한 소모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이 이같은 분파주의를 먼저 자극했다. 유태인 무덤 훼손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이틀 전, 니콜라스 사코지 경제장관의 발언이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그는 이 날 국회에서 미국 순방 결과를 보고하던 중 “리오넬 조스팽 정권이 들어선 이후 프랑스는 미국인들에게 반유태주의 국가로 낙인 찍혔다”라며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흥분했다.

사코지 장관은 미국 순방 때 미국유태인위원회의 ‘영접’을 받으며, 앞으로 프랑스 정부는 단호하게 반유태주의 바람을 잠재우겠다고 공언했던 터였다. 그의 호언장담에 몇몇 프랑스 기자는 ‘미국인 사코지’라는 별명까지 달아주며 그를 비난하는 기사를 썼다. 사회당 의원들은 사코지 장관이 사회당을 반유태주의의 진원지처럼 묘사했다고 격노했다. 프랑스 여론은 좌파와 우파의 문제가 아닌 민감한 사안을 정략적 차원에서 접근한다며 역정을 냈다.

지난 5월17일 파리 시내에서 벌어진 ‘SOS 안티세미티즘 및 안티라시즘’ 집회에 수많은 단체가 몰려나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반유태주의도 문제이지만, 반이슬람주의·반흑인주의 등 모든 인종차별주의를 더 이상 방관하지 말자’는 취지였다. 반인종차별주의 운동 단체인 ‘SOS 라시즘’과 ‘비굴함도 없이 굴종도 없이’ 등이 집회를 주최했지만, 집권당은 물론 사회당·녹색당 등 정계 인사들도 총출동했다. 사회당 인사들이 니콜라스 사코지의 발언을 의식해 국민에게 ‘뭔가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방송을 통해 프랑스 반유태주의 바람을 공공연하게 비판하고 다닌 골수 유태계 인사들까지 시위에 참가해 ‘모든 세력이 이제는 한마음 한뜻’임을 과시했다.

‘실패한 데모’로 끝난 반인종차별주의 집회

그러나 녹색당 대표 노엘 마메르는 몇몇 유태계 청년들로부터 케첩 세례를 받았다. 그가 친팔레스타인 정견을 여러 차례 밝혔기 때문이다. 노엘 마메르는 “아무리 옳은 명분으로 모이면 뭐 하나. 이런 분파주의야 말로 치명적인 적이다”라며 개탄했다. 시위에 참가했던 한 시민단체 회원은 원래 취지를 망쳐버린 ‘실패한 데모’라고 푸념했다.

반유태주의 문제는 온갖 시각이 뒤섞여 쉽게 해결되기가 어려워 보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는 한 안티세미티즘이라는 단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숨 짓는 사람도 많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로제 쿠키에르만이 ‘프랑스 유태인 단체 대표자 회의’ 회장에 재선되었다. 그는 지난 임기 때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비판을 모두 반유태주의라고 몰아붙인 강경 보수파의 대표자이다.

‘SOS 라시즘’의 한 회원은 최근 리베라시옹에 투고한 글을 통해 ‘이스라엘 옆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기를 희망하는 유태인과 유태인 국가만을 세우기 원하는 유태인들을 명백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자기네는 후자가 아니고 전자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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