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68 혁명 30돌 맞아 재평가 활발
  • 崔寧宰 기자 ()
  • 승인 1998.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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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68 혁명 30돌 맞아 역사적 평가 작업 활발
‘프랑스는 베트남을 해방해야 한다’ ‘우리 의식 속의 경찰을 없애자’‘모든 상상력을 해방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30년 전인 68년 5월 프랑스 전역을 뒤흔든 68 혁명의 구호들이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역사를 뒤바꾼 이 혁명은 우습게도 성(性) 문제가 발단이었다. 68년 1월8일 낭테르 대학 수영장 개장식. ‘붉은 머리 다니’라고 불린 68 혁명의 학생 지도자 다니엘 콘 방디는 행사장을 방문한 체육청소년부 장관에게 “체육청소년부의 올해 백서를 읽어 보았다. 6백 쪽이나 되지만 청소년의 성 문제는 어느 구석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라고 제기했다. 일개 대학생이 처음 만난 최고위층 관료에게 무례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한 장관은 이를 무시하고 딴청을 피웠다. 그러자 학생들은 “만약 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여기 풀 안에나 들어가시지”라며 장관을 행사장에서 쫓아냈다. 이 사건 이후에 학생들은 여학생 기숙사에 남학생이 출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다 3월22일 대학을 점거했다. 청소년의 성 문제 해결과 프리 섹스를 주장하던 낭테르 대학생들의 주장은 곧 학내 민주화 요구로 이어지고, 마침내 반제국주의 흐름으로 바뀌었다.

5월이 되자 대학생들의 시위는 노학 연대 투쟁으로 발전했다.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연대해 총파업하자 프랑스는 마비 상태에 빠져 들었다. 사태가 이렇게 돌변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경제 성장 정책 덕분에 물질적으로는 부유했지만, 드골 대통령의 오랜 독재 체제에서 권위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사회는 틀에 박힌 것 일색이었다. 대학 강의실에 교수가 들어서면 학생들은 모두 일어섰다가 교수가 앉아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정치 체제는 민주주의였지만 사회 체제는 경직되어 있었다. 조직에서 윗사람의 권위에 아랫사람이 도전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가정에서는 가부장제가 판쳤고, 여성의 권리는 억압받고 있었다. 학교의 선후배 규율도 엄격했다.

또 당시 프랑스는 국제 사회에서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알제리 전쟁도 끝났고 베트남에서도 물러난 상황이었다. 68년 3월15일자 <르 몽드>는 이같은 상황을 ‘학생·노동자·시민의 질문에 답해 주는 교수·사용자·정치인이 없다. 말길이 막힌 사람들은 심심하고 지루하다. 지친 프랑스 사람들은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강렬하게 일어날 수도 있다’라고 표현했다. <르 몽드>의 예견은 두 달 뒤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는 68 혁명의 성과를 따지는 논쟁에 휩싸여 있다. 당시 시위의 주역들이 다시 모여 혁명의 역사적 공과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언론들도 잇달아 특집 기사를 마련하고 있다. 학술 세미나도 줄을 이었다. △68혁명은 진정한 혁명인가, 미완의 혁명인가 △그 유산은 무엇이고 당시 주역들이 이루려 했던 꿈은 실현되었는가 △68 혁명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가 토론의 핵심 주제이다.
비판론자들 “좌파 학생들이 프랑스 후퇴시켰다”

이 논쟁에서 비판론자들은, 현실 감각이 없는 좌파 학생들 때문에 사회가 오히려 퇴보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68년 이후부터 프랑스는 기성 세대가 보기에는 완전히 버릇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우선 말에서부터 존칭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학에서 학생이 교수를 부를 때도 직함을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결혼보다는 동거가 광범위하게 퍼진 것도 이 때부터이다. 식당이나 거리에서도 마음놓고 담배를 피울 수 있게 되었다. 거리에서 담배 꽁초를 버리더라도 나무라지 않는다. 청소부들의 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무임 승차하는 젊은이를 보아도 비난하는 사람이 없다. 벌금을 내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그래서 68년 초까지 파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사회학자 레이몽 아롱은 훗날, 파리 대학 사건을 ‘일부 장난꾸러기들의 바보 같은 소동’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68 혁명 때문에 프랑스의 경제도 크게 후퇴했다고 지적한다. 무차별 평등을 주장한 학생들과, 임금 인상·근무 시간 단축을 주장한 노동자의 요구를 수용했기 때문에 경제 발전이 힘들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혁명이 발발한 지 1년 뒤인 69년 대통령 직을 내놓은 드골의 하야 성명을 기억하고 있다. 드골은 69년 4월25일 성명에서 ‘프랑스는 더 이상 강력한 힘이 없기 때문에 힘 있는 정치 기반이 필요합니다.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프랑스는 별 볼일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 뒤 낙향했다. 드골의 예언대로 프랑스는 이후 국제 사회에서 주도권을 잃었다. 경제력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면 미국은 바로 1년 뒤인 69년 인류 최초로 달 표면을 밟았다.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독주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긍정론자들은 68 혁명이야말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가 본격적인 개혁을 향해 나아가는 분수령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들은 68혁명 덕분에 프랑스 사회 곳곳에서 억압을 걷어내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사회 혁명을 이룰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68 혁명의 여파는 프랑스뿐 아니라 전세계로 퍼져갔다. 독일의 경우는 68 세대가 녹색당 같은 진보적 정당을 창설했다. 요즘 사민당 총리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슈뢰더도 68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인종 문제나 신나치주의 같은 독일의 우경화 경향에 제동을 거는 것도 바로 68 세대이다. 영국에서는 68 혁명이 노동당 이론으로 흡수되었다.

68 혁명은 미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학생들은 베트남 반전 운동에서부터 공민권 운동까지 폭넓은 활동을 벌이면서 사회에 편입되었다. 68년 대학을 나온 클린턴도 이 세대라 할 수 있다.

공산권이던 동유럽도 영향권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폴란드 학생운동을 지도한 야체크 클론 등은 체제 활동을 이끌어 결실을 보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학생운동은 68년 여름 소련과 동유럽군에 짓밟혔지만, 89년 ‘벨벳 혁명’ 때 개혁의 불씨로 되살아났다.
“삶의 질 추구하는 탈권위주의 정신 본받자”

68 세대의 이상은 81년 프랑스 사회당의 미테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꽃을 피웠다. 이후 68 혁명 정신은 유럽의 신사회 운동(반전·반핵·여성·환경·공동체 운동)으로 발전했다.

68 혁명의 이념은 한국 현실에서도 돌아볼 구석이 많다. 한국은 그동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왔다. 독재 정권이 오랜 세월 국민을 억압했다. 그러한 독재는 국민의 투쟁으로 극복되었다. 민주화에도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삶의 질은 안중에 없고 무한 경쟁만을 강조하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68 혁명의 정신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 아직도 권위주의가 판을 치고 있고, 개인이 제 목소리를 낼 통로가 거의 막혀 있다고 강조한다. 성균관대 정현백 교수는 “한국 사람들은 정치범으로 탄압받고 고문받은 사실은 문제 삼지만 생활 구석구석에 미치는 통제와 억압은 보지 못한다. 이제는 사회 구석구석에서 권위주의와 비민주적인 요소를 몰아내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주장은 경제 난국을 극복해야 하는 현시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래를 조금만 길게 내다본다면 68 운동의 문제 의식이 한국 사회의 모델로서 유효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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