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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기본합의서 실천 ‘이심전심’

김대통령, 입장 천명→북한 맞장구→대통령 취임사, 정상회담 강력 제의→북한의 화답은?

南文熙 기자 ㅣ sisa@sisapress.com | 승인 1998.03.12(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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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9월16일 평양. 제8차 남북 고위급회담의 일환으로 전개된 교류협력분과위원회 회의장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 한국측 대표인 임동원 당시 통일원 차관(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실무 협상에서 남북간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밤 9시부터 양측 위원장이 담판을 벌이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북측의 태도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북측은 미전향 장기수인 이인모 노인을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은 이노인을 송환하는 조건으로 △이산 가족 상봉 정례화 △판문점에 이산 가족 면회소 및 우편물 교환소 설치 △북이 억류한 동진호 선원 송환을 요구했다. 그런데 최대 쟁점 사항이던 이산 가족 문제에 대한 북측의 태도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남북 양측 회담 대표들은 마침내 밤 11시 판문점에 이산 가족 면회소를 설치하고,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적십자 회담을 즉각 재개한다는 합의에 극적으로 도달했다.

한국측 대표단은 17일 오전 0시30분 이같은 회담 결과를 담은 급전을 청와대에 보내고 훈령을 요청했다. 그런데 청와대가 보내온 훈령은 예상 밖으로 강경했다. 즉 동진호 선원 귀환 등 우리측의 세 가지 조건이 모두 타결되지 않으면 이인모 송환에 합의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같은 훈령으로 인해 우여곡절 끝에 타결되었던 이산 가족 면회소 설치는 좌절되고 말았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훈령 조작 사건

청와대 훈령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협상 대표들이 서울로 돌아온 뒤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다음해인 93년 11월 국회에서 민주당 이부영 의원(현 한나라당)이 폭로함으로써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청와대 훈령 조작 사건이다.

92년 9월의 이산 가족 면회소 설치 타결과 좌절은 남북 관계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북한이 체제 유지 차원에서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이산 가족 문제를 전향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은, 그 전 해에 서류상으로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좌절은 그 이후에 나타난 남북 관계 암흑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회담이 무산된 이후 북한은 곧 팀스피리트 훈련을 빌미로 대화 거부를 선언했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던 한국은 이선실 간첩 사건으로 맞대응했다. 그 후유증은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까지 이어져, 북한의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 및 94년 3월의 ‘서울 불바다’ 발언 등으로 남북 직접 대화가 사실상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기본합의서 체제 부활과 그 시범 사업으로 이산 가족 상봉 문제가 다시 거론되는 것을 보면서 ‘과거는 잊힐지언정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된다. 과거의 주역들이 무대에 다시 등장하면 그들의 기억에 잠겨 있던 과거는 다시 현실의 한복판에 등장하는 것이다. 대선 기간, 또는 대통령 선출 직후 남북 관계 해법으로 기본합의서 체제로 복귀하자고 일관되게 주장한 김대중 대통령이 새 정부의 외교안보수석으로 임동원 아태재단 사무총장을 지명한 것은 바로 ‘과거 부활’의 한 상징이 되었다.

92년 남북 협상의 주역이었던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은 새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김대통령의 그동안의 발언을 소개하는 간접 화법으로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본합의서 체제 부활이 그 요점이라는 점을 분명히했고, 이를 위한 첫 시범 사업으로 이산 가족 사업 재추진을 지목했다. 그는 “최소한 면회소 설치와 서신 왕래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라며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수준 맞는 상대’ 비로소 만난 셈

대통령 선거 이후 침묵으로 일관하던 북한측이 최근 화답성 발언을 시작한 것도 임수석에게 자신감을 주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남과 북이 주고 받은 간접 대화의 양상을 보면, 이제야 수준이 비슷한 상대끼리 대면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준다. 2월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이산 가족 상봉을 새 정부의 100대 과제에 포함한 데 이어,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2월14일 이북5도민회 신년회 연설에서 이산 가족 상봉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밝힘으로써 남북간 첫 대면의 주제를 압축해 제시했다.

북한측 반응은 그 다음날 북한 중앙방송이 ‘3월부터 사회안전부 산하에 이산 가족 주소 안내소를 설치해 국내와 해외의 이산 가족 찾아 주기에 적극 나서겠다’라고 밝힘으로써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산 가족 사업 담당 기구로 대남사업 기구인 통일전선부나 해외동포원호위원회가 아니라, 북한의 경찰 격인 사회안전부가 지목된 점이 다소 애매하지만, 문맥으로는 한국측 제의에 대한 화답임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자 김대통령은 2월19일 보도된 CNN과의 회견에서 북측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나는 반드시 북한과 대화를 재개할 것이며,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 회담이나 특사 교환 등 어떤 방법도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새 정부에 대한 북한의 정리된 입장을 천명하는 듯한 북한측 고위 인사들의 발언이 잇따랐다. 우선 지난 2월18일 평양의 인민문화궁전에서 ‘정당사회단체연합회의’가 열렸는데, 기조 발언에 나선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는 “남조선의 정당 단체를 비롯해 그 누구와도 대화와 협상을 할 용의가 있다”라고 밝혔다. 그의 이 발언은 “오늘 우리 앞에 나서는 간절한 과제는 대화와 협상의 분위기를 조성해 가는 것… 서로 접촉을 통해 이해를 깊이하고 신뢰를 도모해야 한다”라는 발언에 이은 것이다.

김용순의 발언은 그가 북한 노동당의 대남 정책을 총괄하는 대남담당 비서라는 점, 또 매년 대남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성격을 띠는 정당사회단체연합회의가 올해에는 예년보다 한 달 이상 늦게 열렸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새 정부 출범에 맞추어 북측의 입장을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김용순의 발언에는 대화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한국의 새 정부가 북한에 대해 화해 정책을 추구해야 하고, 이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 철폐와 안기부 해체를 선행해야 한다는 조건이 덧붙기는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용순 발언을 전후로 해서 일본 니가타와 중국 베이징에서 이를 보충하는 듯한 북한측 인사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지난 2월17일부터 19일까지 일본 니가타에서 열린 ‘동북아시아경제회의 98’에는 북한의 대표적인 경제 두뇌인 김수용 김일성대학 교수와 김웅렬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했다. 김수용 교수는 주제 발표 자리에서 ‘남북한 철도 연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참석자의 질문에 “그 문제는 남북기본합의서에 이미 다 들어 있다. 기본합의서만 준수되면 내일이라도 된다. 우리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명쾌하게 밝혔다고 한다. 당시 회의 참석자에 의하면 김교수는 사석에서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된 것을 상당히 고무적으로 생각한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불바다’ 발언 주인공 박영수 “와전됐다” 해명

거의 같은 시기인 지난 2월20일 베이징에서는 더욱 상징적인 일이 있었다. ‘남북 해외동포 통일회의’라는 국제 학술회의에 ‘불바다’ 발언으로 유명한 북한의 박영수 조평통 부위원장이 참석해 당시 발언이 와전되었다고 해명한 것이다. 박영수는 김수용 교수와 마찬가지로 “남조선에서 정권이 교체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라고 하면서, 이를 ‘모처럼 닥쳐 온 기회’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기회에 ‘남북 쌍방이 접수할 공동의 방책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박영수와 사석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국내의 한 인사에 따르면, 박영수는 북측이 대화 조건으로 제시한 연북화해정책이 주한미군 철수 같은 본질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일본의 대북 관계 개선이나 식량 지원에 대해 남측이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조건이 대단히 완화된 셈이다.

그동안 신중한 자세로 북한의 입장 변화를 관찰해 온 통일원의 한 고위 당국자는 북한이 박영수를 학술회의에 ‘고의로’ 파견한 것에 주목했다. 박영수는 92년 남북 대화가 활발했을 때 적십자 회담 및 특사 교환 예비 회담의 북측 대표였다. 따라서 북한이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에서 박영수를 보내 ‘불바다’ 발언을 해명한 일은, 박영수로 상징되는 적십자 회담 또는 특사 교환에 응할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영수는 사석에서 2월25일 대통령 취임식 연설을 지켜보겠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식 연설에서 또 한번 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특사 교환과 정상 회담 개최를 강력하게 제의했다.

2월 중순부터 남과 북은 5년간 쌓인 ‘얼음 장벽’을 사이에 두고 화해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그동안의 순서로 보면 이제 북한이 화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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