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언론의 '게이 장관' 발가벗기기
  • 런던·韓准燁 편집위원 ()
  • 승인 1998.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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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각료 중 4명이 동성애자” 폭로…일반 반응은 무덤덤
영국 런던의 남쪽 관문인 워털루 역에서 남서 쪽으로 이어지는 교외선 다섯 번째 지하철 역, 클래팜 코먼(Clapham Common). 이 정거장을 중심으로 펼쳐진 공원의 으슥한 숲속에 초겨울 어둠이 깃들면 여기저기서 남자들의 초조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여우가 눈에 불 켜고 먹이 사냥하듯 어둠 속을 두리번거리고 배회하다 이윽고 짝을 찾은 동성애자(gay)들은 쌍쌍이 공원을 서둘러 빠져 나간다. 바로 이 곳이 최근 영국 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이른바 게이 스캔들의 진원지이다.

지난 10월26일 저녁, 이 지역에서 강도·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인 중년 신사가 경찰에서 밝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그는 클래팜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만난 한 청년에게서 이날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두 남자가 주차장내 그의 차로 가던 중 청년의 동료인 남녀 한쌍을 만나 네 사람이 함께 차에 올랐는데, 문제의 청년이 갑자기 칼을 꺼내들고 중년 신사를 위협·폭행해 지갑과 휴대용 전화를 빼앗고 그를 어둠 속에 버려 둔 채 차를 몰고 사라졌다.

피해자의 진술대로라면 이 사건은 단순히 산책객의 금품을 노린 집단 강도 폭행 사건의 하나일 뿐이다. 이례적으로 신속한 피해자의 신고로 범인 3명이 사흘 만에 체포되어 이 사건은 그대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제3의 인물들이 차례로 검거되면서, 이들이 모두 한 그룹에 속한 동성애자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피해자의 당초 주장대로 금품만을 노린 것이 아니고 또 다른 동기가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온갖 변태 행위와 그룹 섹스를 자행하는 동성애자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폭력이 행사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또 경찰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상습적으로 금품을 뜯어온 범죄 조직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수사하고 있다.

데이비스 장관, 파문 일자 사임

그러나 사건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문제의 중년 신사가 바로 블레어 내각의 론 데이비스(52세) 웨일스 담당 장관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큰 파장이 인 것이다. 사건 발생 다음 날 , 이 사건을 게이 섹스 스캔들로 몰아 톱 뉴스로 다룬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집중 포화를 맞은 데이비스 장관은 즉각 블레어 총리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장관 직을 사임했다. 데이비스 장관은 사건 발생 장소가 악명 높은 클래팜 코먼이었다는 점, 그리고 현장에서 만난 젊은이 3명과 결코 섹스 또는 마약 거래가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자신의 중대한 판단 착오로 일어난 이 강도 사건으로 정치적 사회적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사과한다고 말했다.

데이비스 장관이 자신의 정치적 지위나 명예에 결정적 손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사건을 자진해서 서둘러 경찰에 신고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블레어 총리가 내각 출범 후 처음으로 각료의 자진 사표를, 그것도 유례 없이 신속하게 수리한 속사정은 무엇일까?

그와 같은 의문 때문에 언론들은, 의회에 대한 데이비스 의원의 해명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년에 출범하는 웨일스 독립 자치 의회를 이끌 인물로 블레어의 ‘낙점’을 받았던 중견 정치인 데이비스 의원의 숨겨진 이중 생활 전모가 밝혀지면서 의혹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딸을 둔 기혼자이지만 그는 지난 2년 동안 선거구를 오가면서 웨일스와 잉글랜드 접경 지역에서 비밀리에 동성애자들과 수시로 접촉하는 등 성적으로 이중 생활을 계속했다.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는 게이 세계의 특수성 때문에 사건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이비스 의원의 비밀스런 성생활이 폭로되자 노동당 정부의 다른 각료 가운데 나머지 동성애자들의 정체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언론들의 폭로 경쟁으로 먼저 농무장관 닉 브라운(48)의 동성애 전력이 드러났다. 그동안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감춘 정치인들과 은밀하게 성관계를 맺어 온 동성애 파트너들이 대중 신문들이 제시한 돈에 홀려 경쟁이라도 하듯 흥미 위주의 섹스 스토리를 팔아 넘겼기 때문이다.

사전에 자신의 동성애 관련 스토리가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일요판 타블로이드 <뉴스 오브 더 월드>에 흘러갔음을 눈치챈 총각 장관 닉 브라운은 선수를 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자진 공개했다. 그는 자신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던 한 파트너에게 80파운드 상당의 선물을 준 적은 있지만, 결코 섹스의 대가로 돈을 준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업성을 내세운 황색 언론의 횡포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명예를 지키지 못한 채, 자신의 성적인 프라이버시를 일반에 공개해야 하는 현실에 큰 비애를 느낀다고 말했다.

서둘러 사직서를 수리했던 데이비스 장관의 경우와는 달리, 블레어 총리는 브라운 장관을 오히려 격려하는 특별 지지 성명을 즉각 발표했다. 동성애자라는 사실과 각료로서의 직무 능력은 별개라면서 내각에서 유능한 동성애자 각료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는 동성애 스캔들이 몰고올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풀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 파문은 가라앉지 않고 계속 확대되었다. 블레어 총리 집권과 개혁 노선 설정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피터 멘델슨 상공장관도 본인이 부인했지만 언론인 매튜 패리스의 전격적인 폭로로 동성애자임이 처음으로 일반에 알려졌다.

브라운 농무장관이 스스로 동성애자라고 인정하기 전까지,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각료는 내각 출범 당시 젊은 파트너와 동거한 것으로 알려진 크리스 스미스 문화장관이 유일했다. 그러나 지난 3주일 동안 영국 언론의 동성애자 정치인 발가벗기기 경쟁으로 블레어 내각 각료 가운데 현재까지 최소한 4명이 동성애자로 드러나거나 동성애자로 의심받고 있다. 보수당 집권 당시 여당 의원을 지낸 매튜 패리스 같은 언론인은 자신이 의원 직에 있을 때만 해도 멘델슨 장관 같은 숨겨진 동성애 의원이 20∼30명에 달했다고 주장했다.

블레어 내각의 남성 각료 17명 가운데 24% 선인 4명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분명히 메이저 전 총리의 보수당 정부 시절 빈번히 터져 나왔던 각료 및 여당 정치인들의 각종 성 추문처럼 집권 노동당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만한 부정적 영향을 아직 미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게이 스캔들에 대한 영국 국민의 관용 혹은 무관심은 여론을 뒤늦게 쫓아간 타블로이드 신문 <선>을 포함한 영국 언론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열 올리던 언론들, 뒤늦게 태도 바꿔 ‘자제’ 선언

이미 사임한 데이비스 장관에 이어서 브라운 농무장관의 성생활을 집요하게 추적·보도해 온 <선>은 이달 초까지만 해도 1면 머리에 ‘영국은 이제 게이 마피아 도당에 휘둘리고 있다’는 자극적인 표현을 쓰며 동성애 혐오 감정을 노골적으로 부추겼었다. <선>은 그 일례로 여론조사에서 국민 69%가 반대한 ‘동성애자 성적 접촉 연한 하향 조정안’이 하원에서 통과된 사실을 들었다. 그런 <선>의 논조가 갑자기 180도로 선회한 것은 론 데이비스 장관이 사임한 지 2주가 지난 11월12일이었다. 이 신문은 ‘동성애자에 대한 여론 흐름과 사회의 태도가 바뀌고 있다. 앞으로 중차대한 공익에 관련되지 않는 한 남녀 동성애자들의 개인 신분을 결코 공개·보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동성애에 관한 전통적인 혐오 노선에 일대 수정을 가한 <선>은 그 구체적 행동으로, 피터 멘델슨 장관이 자신처럼 동성애자라고 BBC 방송의 심야 대담 뉴스에서 주장한 정치 평론가 매튜 패리스를 계약 칼럼니스트 직에서 즉각 해고한다고 발표했다. 다른 대부분의 언론도 <선>의 ‘게이 정치인 신분 공개 자제’라는 변화 노선을 따랐다.

이같은 언론들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는 어디에서 말미암은 것일까? 그것은 중산층이 대부분인 국민이 더 이상 그들의 지도자나 정치인들이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느냐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의 <옵저버> 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 국민 대다수는 법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자신들의 생활 방식에 정부가 가부장적 윤리 규범의 잣대를 들이대며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이것은 유권자인 시민들이 정치인들의 위악과 위선에 실망한 나머지 극도의 정치 냉소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 여론 조사에서는 정치인들이 ‘가족의 가치’ 등을 강조할 때 국민의 8%만이 그들의 발언을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날 영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일찍이 교회법은 동성간 성적 행위를 중범죄로 규정해 금해 왔고, 16세기 중반에는 의회법에 따라 동성·이성에 관계없이 남색이나 비역질 행위자는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그러다 지난 60년대 중반에야 동성 간에 합의된 성행위가 합법화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동성간 성행위를 승낙받아야 하는 연령을 낮추기 위해 계속 노력해 왔고, 이에 따라 사회의 의식 변화도 뒤따랐다. 지난 11월10일 <가디언>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56%가 동성애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는 긍정적 견해를 보였다. 또 <미러>의 여론조사에서도 특히 정치인들의 성생활은 단지 그들 자신의 사적 문제일 뿐이라는 견해가 60%선을 넘었다.

영국의 게이 파문이 보여주듯 영국은 물론이고 독일·프랑스·이탈리아 그리고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정치인들의 성생활에 대한 일반인의 반응은 점차 시들해지는 추세다. 게다가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 전반의 전통적인 적대감과 부정적 인식도 차츰 완화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중립 노선을 걷는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이번 사태의 초기에 언론이 독자들의 호색 취향을 부추겨 개인의 사생활 폭로라는 권력 남용 횡포를 부렸다고 자기 비판하면서도, 영국 사회 일각에 아직도 동성애 혐오 및 공포증이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상기시켰다. 국민의 36%가 아직도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용납하지 않고 있으며, 동성애자의 각료 등 공직 취임에 반대하는 반동성애자들이 전체 인구의 33%에 이른다는 것이다. 특히 전통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영국 성공회 등 종교계에서 동성애자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쉽게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

‘도덕 정치’ 내세운 노동당 내각 타격

종교계와 도덕주의자들의 끈질긴 성 윤리 확립 주장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대통령의 성 추문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도덕적 잣대와 미국 중간 선거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구촌 곳곳의 사회가 정치인 등 공인의 사생활을 정치적 타협과 거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의 의식 변화를 특집으로 다룬 <뉴스 위크> 최근호의 결론이다. 나아가 일반인은 끓어오르는 호기심과 성적 흥미 때문에 타인의 사생활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지만, 가치 판단만은 유보한다는 것이 이번 게이 추문 보도에서 새로운 방향 전환을 꾀한 영국 언론들이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국 국민과 언론의 태도가 많이 변했지만 지난 1년 반 동안 혼인 제도의 중요성과 가족의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며 도덕 정치 구현을 기치로 내걸었던 블레어 총리의 노동당 정부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앞으로 당내 동성애자 정치인들의 ‘비도덕적 성 거래’ 실상이 더 드러날 경우 노동당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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