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 떨어진 외교 채널을 복구하라
  • 許匡畯 기자 ()
  • 승인 1998.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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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내 지한파 거의 소멸… 다양한 채널 재구축해야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 한국 외교는 건강한 상태인가.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문민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미, 한·일 관계의 속을 들여다보면 적지 않은 문제가 발견된다. IMF 사태와 어업협정 문제로 상징되는 한·미, 한·일 간의 불협화음은 그동안 두 나라를 수수 방관하다시피 한 문민 정부의 외교 자세에서 말미암았다는 지적이 많다. 과연 새 정부는 양국과의 외교 라인을 복원할 수 있을지, 한국이 동북아에서 어떠한 국제 전략을 선택해야 하는지 진단해 본다. <편집자>

지난 2월26일 밤 한국의 한 법률회사 초청을 받아 강연한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현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는 한국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대통령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오랫동안 김대통령과 교분을 가져온 그레그 회장이 김대통령의 여러 특성 가운데서 유독 그의 영어 구사 능력에 주목하라고 한 것은 뜻밖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강연장에 모인 청중에게 이 말은 김대통령의 외국어 구사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대해 귀를 열고 태평양 너머에서 날아오는 소리를 들을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레그 회장의 견해로 미루어 보면, 미국측은 김대통령이 미국과 충분히 ‘말이 통하는’ 지도자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미국의 엘리트와 원활하게 의사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한·미 간의 완벽한 교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양국의 비공식 관계가 그리 낙관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1월14일 한국을 방문하고 있던 제임스 슐레진저 전 국방장관은 미국의 의회·행정부·두뇌 집단 어디에도 한국에 우호적인 친구들이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한국이 문제에 맞닥뜨릴 때마다 미봉책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는 외교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슐레진저의 눈에는, 평상시에는 소 닭 보듯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다가 막상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이런저런 인맥을 끌어대려고 허둥거리는 한국인들이 한심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정부 관계자들은 경제 위기 사태를 겪으며 이같은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무엇보다 워싱턴에 말이 먹힐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1월 말 한국 외채실무협상단이 뉴욕으로 급히 날아가 벌인 외채 협상에서, 재경원 법률 고문으로 나서 그럭저럭 다행스런 결과를 이끌어낸 미국 변호사 마크 워커에게 훈장을 주자는 주장까지 나왔을까.

많은 외교 전문가들은 현재 한국과 미국 간의 의사 소통이 상당히 걱정스러운 상황이라고 분석한다. 물론 안보 동맹을 기축으로 한 두 나라 정부 간의 든든한 고리는 녹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 조야에서 한국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사라졌으며, 이에 따라 미국 사회에서 한국 이익을 제대로 대변할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IMF 사태를 겪으며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선 미국 공화당이 주도하고 있는 의회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지원하려는 행정부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한국 정부로서는 달러가 한푼이 아쉬운 마당에 속이 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문민 정부 소극적 태도로 ‘의사 소통’ 단절

그동안 공식·비공식으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갖고 있었던 한·미 채널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화살은 최근 몇 년, 특히 문민 정부 5년 동안 미국을 심드렁하게 대해 온 한국 정부의 태도에 집중된다. 많은 분석가들은 최근 5년여 동안 한·미 간의 여러 채널이 급속히 느슨해지고 다양한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그것은 김영삼 정부의 지나친 자신감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평가된다. 과거 정부처럼 인권이나 정통성 문제 같은 약점이 없으므로 미국을 공들여 관리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여긴 탓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 관리들이 지나치게 권위적인 자세로 일관해 대미 관계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나라 간에 무역 마찰 같은 경제적 갈등이 발생하면 외교가 전면적으로 작동하고 협상 창구를 열어 대화와 협상으로 유연하게 갈등을 풀어가는 것이 순리인데, 한국 관리들은 그와 반대로 급속히 경직되어 강경 일변도 자세를 고집하는 바람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최근 몇년 동안 한국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친구로 붙잡아두는 일이 한국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을 심사숙고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 미국 관리는 “겉으로는 한·미 간에 의사 소통이 잘 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한국 정부측에)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느슨해진 관계를 대표하는 것은 양국 의원 간의 채널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국회의원과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간의 한·미 포럼은 실상 양국 의원이 정기적으로 만나 동북아 문제를 다루는 연례 협의체였다. 한국과 미국에서 번갈아 열리던 이 포럼은 현재 거의 활동이 중단된 상태이다. 이에 따라 국회 차원의 대미 채널은 개인적인 것말고는 단절된 셈이다.
미국과의 친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한·미 재계회의 활동에서 잘 알 수 있다. 올해로 11년째를 맞는 이 회의는 양국 기업가들이 만나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한·미 재계회의 역시 서울과 워싱턴에서 번갈아 열리는데, 매 회의의 중간쯤 시기에 지리적으로 중간쯤인 하와이에서 준비 모임을 갖는다. 한 한국측 관계자는 이 회의에 참가하는 미국 기업가들은 월 가(街)의 투자가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투기꾼이 아니라 그야말로 기업가들로서, 한국을 소홀히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고 이러한 생각을 의회에 꾸준히 반영시키는 그룹이라는 것이다.

올 6월 서울에서 열릴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지난 1월 하와이에서 만난 두 나라 기업가들의 대화는 온통 한국 경제에 대한 걱정 일색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양국 참석자들은 논의 끝에 결의안을 하나 만들었다. 한국은 시장 개방과 개혁을 적극 추진해야 하며, 미국도 장기적 안목으로 한국의 재기를 도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96년 한국이 지적재산권 우선감시대상국에서 감시대상국으로 한 단계 떨어진 것도 이 회의의 활동에 힘입은 것으로 평가된다. 하와이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위의 관계자는 “역시 오래 전부터 만나던 사람들이 좋더라”는 말로 그 값어치를 명료하게 표현했다.

86년 창립된 서울국제포럼은 한국과 미국 학계가 만나는 중요한 마당이었으나, 최근 활동이 시들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홍구·한승주·김경원 박사 등 학계와 경제계가 주축이 되어, <포린 어페어스>를 발행하는 미국의 대외관계협의회와 정기적으로 접촉하던 이 포럼은, 그동안 북한 문제나 한·미 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많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그밖에 미국의 여러 두뇌 집단들, 즉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국대사가 선임연구원으로 있는 공화당계의 미국공공정책연구소(AEI)나 헤리티지 재단, 마이클 아마코스트 전 국무부 차관보가 소속된 민주당계의 브루킹스 연구소, 카네기 재단의 평화재단 등은 한국으로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이다. 이들은 모두 정부나 의회의 정책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들에게서 한국과 관련된 활동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한국을 위해 활발히 뛰고 있는 것은 뉴욕에 있는 그레그 전 대사의 코리아 소사이어티다. 이 단체는 지난해 백여 차례에 걸친 강연·방송·세미나 등을 통해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작업을 꾸준히 펼쳤다.

또 한국에서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김정원)이 헤리티지 재단·브루킹스 연구소·국제전략문제연구소와 긴밀한 관계를 지속하며, 예일 대학을 비롯한 주요 명문 대학에 한국학 프로그램을 차례로 설치하고 있다.

민간 차원의 한·미 교류 단체인 한·미 우호협회 소속 김상철 회장 등 대표단 5명은 지난 2월23일 미국으로 날아갔다. 이들의 방미 목적은 민간 차원에서 미국 여론 지도층과 국무부·국방부 등 주요 기관의 정책 결정자들에게 한국의 상황을 이해시키고 한·미 우호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상철 회장은 출발하기에 앞서 “정부가 할 수 없는 말을 민간 단체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한국이 미국의 국익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겠다”라고 말했다.
합법적 로비 활동 적절히 활용해야

혹은 단절되고 혹은 느슨해진 양국간 채널을 새 정부는 어떻게 손질할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은 다양한 대미 인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측도 과거와는 달리 양국이 조화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 개인의 인맥이 국익 차원으로 승화하려면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 중 하나는 한국내 미국 전문가들을 적극 활용해 국익을 도모해야 한다는 점이다. 국제교류재단 김정원 이사장은 “미국을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국식 가치관과 사고 방식을 이해하는 인적 자원을 적극 활용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현홍주 전 주미 대사는 “인적 자원을 전략적으로 조직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가 이들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워싱턴 정·재계를 누비고 다니는 변호사들을 적극 활용해 한국 이익을 대변할 채널을 만드는 데도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합법적으로 허용된 로비 활동을 적절히 활용하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70년대 중반의 박동선 로비 사건과 같은 뇌물 로비가 아니라, 전략적이고 조직적으로 우군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한 전문가는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말한다.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이 금언이 외교 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답은 ‘그렇다’이다. 외교도 결국 사람 관계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라 살림이 거덜나 ‘천냥 빚’을 지고 있는 한국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한다고 해서 외채를 탕감받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한국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상황이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음은 명백하다. 하물며 그 상대가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임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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