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덮친 '환난의 불길'
  • 자카르타·임성민 (자유 기고가) ()
  • 승인 1998.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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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총체적 위기 계속될 듯… 화교가 유출한 달러 들여와야 ‘숨통’
인도네시아 사태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루피아화의 달러당 가치가 3분의 1로 폭락하고 생필품과 공산품 값이 두 배 넘게 뛰어오르면서, 시민들 사이에서 사재기가 기승을 부린 지는 이미 오래다. 최근 들어 자바 섬의 여러 소도시에서는 시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과 경찰이 출동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경제 문제가 발생하면 소수 종족이면서도 이 나라 부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화교들에 대한 적대감이 먼저 표출되곤 한다. 이번에도 전국 대도시와 소도시의 상권을 장악한 화교계 상점에 대한 약탈과 방화가 잇따르고 있다. 최근의 시위는 생필품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경제 위기에서 비롯했다는 점에서, 과거 여러 차례 발생했던 반정부 시위와는 성격이 다르다.

인도네시아 지식인들은 현재의 경제·사회적 위기 상황은 수하르토 정권이 들어서기 전의 상황, 즉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45년부터 65년까지 통치했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 정부 말기의 현상과 매우 흡사하다고 지적한다. 수카르노 정부가 무너진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는 회생 불능의 경제 위기였는데, 현재의 상황이 그때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위기가 군부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는 4성 장군 출신이자 올 3월 임기 5년의 7선 대통령으로 선출될 것이 확실시되는 수하르토 정부가 무너지는 데까지 발전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이곳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그러나 현재의 심각한 경제 위기가 인도네시아 사회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고 있으며, 그 이면에 현정권에 대한 불만이 짙게 깔려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인도네시아가 지금의 총체적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뿐이다. 경제 안정을 이루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인도네시아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최우선 과제는 폭등과 폭락을 되풀이하는 환율을 잡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환율이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97년 8월13일(당시 환율은 1달러당 2천6백82루피아) 정부가 환율 개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직후부터였다. 이때부터 환율이 치솟기 시작해서 1달러당 환율이 1만6천루피아에 이른 때가 있을 만큼 루피아화 가치가 곤두박질했다. 그뒤로도 1달러당 환율은 7천∼9천 루피아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다.
화교, 수하르토 일가와 손잡고 사업 키워

최근 인도네시아 정부는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새로운 외환 관리 기구인 통화위원회를 운영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통화위원회 제도가 가동되면 환율을 달러당 5천루피아로 기준 고시할 예정이다. 이 제도의 관건은, 일종의 고정환율제인 통화위원회 제도를 시행할 때 총통화량과 실제 유통량 가운데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있다.

이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도네시아 정부가 자국 총화폐와 맞먹는 달러·금과 외국 정부가 보증하는 유가 증권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국제통화기금과 외국은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국제통화기금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 제도를 강행한다면 구제 금융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제도의 성패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대외 신인도 회복·외환 보유고 확충·환율 안정에 달려 있다. 그러나 현재 인도네시아 정부는 어느 것 하나도 이루지 못한 처지이다.

인도네시아의 외환 위기와 정치 위기에는 화교 문제도 얽혀 있다. 인도네시아는 4백여 종족, 2억 인구로 이루어진 나라다. 이 중 6백만명 가량인 화교가 국부(國富)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화교들은 수하르토 집권 30년 동안 대통령 일가 및 특권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특유의 상술로 사업을 키웠다. 그런데 지난해 말 후계자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수하르토 대통령 와병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뒤이어 사업과 신변 보장에 불안을 느낀 화교들이 천억달러 이상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화교들이 달러를 유출했다는 소문이 인도네시아 외환 위기의 도화선이 된 셈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제 상황은 정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의 경제 위기가 과중한 외채와 재벌·종금사의 경영 부실 때문이라면, 인도네시아 경제 위기는 수하르토 정부의 장기 집권(65년∼현재)에서 말미암았다. 장기 집권과 대통령 일가 및 고급 관료의 부패 때문에 생긴 정권 말기 현상인 것이다.

지난해 말 또다시 불거진 수하르토 대통령 와병설이 인도네시아 환율 파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올해 77세인 그는 93년부터 와병설에 시달려 왔다. 한때는 그가 키운 측근 중의 측근인 합참의장 출신 부통령 트리 수트리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듯했다. 그러나 트리 수트리노 부통령에 대한 신임이 흔들리고 자신의 건강이 좋아지자 수하르토는 경제 위기 해결을 명분으로 내걸고 7선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수하르토가 부통령 직에 누구를 앉힐 것인가가 관심으로 떠올랐다. 수하르토의 나이와 건강 때문에 차기 부통령이 대통령 직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2월17일자 인도네시아 언론들은 차기 부통령으로 현 과학기술처 장관인 하비비가 여야 3당으로부터 단독 부통령 후보로 천거되었다고 보도했다. 하비비는 술라웨시 섬에서 태어난 민간인으로 독일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오랫동안 수하르토의 총애를 받아온 인물이다. 언론의 보도 직후 군부도 하비비를 부통령에 추천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군부로부터 지지를 받던 수트리노 현 부통령도 2월19일 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수하르토가 인도네시아 최대 재벌인 자신의 친인척들을 사후에 지켜줄 수 있는 인물을 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수하르토는 3월 대선을 앞두고 이미 권력의 핵심인 군부를 개편했다. 각군 참모총장을 최측근으로 바꾸었고, 사위인 쁘라보요 수비안또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특전사령관에 임명했다. 수하르토는 또 하비비를 비롯한 핵심 측근들을 정치권과 군 요직에 잇달아 배치할 계획이다.

어쨌든 인도네시아에 던져진 과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군부 출신이 아닌 하비비가 어떻게 군부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인가, 독점과 특혜라는 온상에서 재벌로 성장한 수하르토 일가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등 해결해야 할 일이 수두룩하다. 그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이 화교들이 유출한 달러를 다시 들여올 방도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러면 경제 위기의 숨통이 트이고 환율도 어느 정도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수하르토는 하비비에게 얼마나 힘을 실어 줄 것인가. 당분간은 여기에 인도네시아 사태의 향방이 달려 있다. 그러나 뽀족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위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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