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를 움직이는 '언론 플레이 귀재'
  • 런던·김용기 편집위원(y.kim2@lse.ac.uk) ()
  • 승인 2000.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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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정부 공식 대변인 알라스테 캠블, 막후 실세로 주목
영국 BBC 2TV는 지난 7월15일 저녁 <총리 관저로부터의 뉴스(News from No 10)>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알라스테 캠블. 올해 마흔세 살이며, 토니 블레어 총리의 공식 대변인이자 실질적인 2인자로 지목되어 온 인물이다.

토니 블레어가 야당 당수로 정치 전면에 등장한 1995년 이래 6년간 블레어의 공보책임자로 활동해 온 캠블은 대중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영국 전역의 가정에 자기를 드러내는 데 동의한 배경은 언론을 조작하는 스핀 닥터(Spin Doctor)의 우두머리라는 그의 존재가 블레어 정부에 커다란 정치적 부담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스핀 닥터란 기자들이 사건을 우호적으로 다루도록 만들기 위해 고용한 고위 정치 대변인을 뜻한다. 캠블 자신이 받게 될 평가가 어떠하든지 스스로를 대중 앞에 공개함으로써 블레어에게까지 전이된 스핀(사실을 굴절시킨다는 의미) 이미지를 단절하자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영국 국민들이 블레어에게서 가장 부정적으로 느끼는 이미지가 그가 정치를 굴절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알라스테 캠블로 대변되는 블레어의 정치 대변인 집단은 1997년 총선에서 대승을 이끌어냈다. 이들은 또한 지난해까지 토니 블레어에 대한 기록적 지지를 유지시켜 왔다. 블레어 총리가 사용한 숱한 새로운 말들, 예를 들면 ‘제3의 길(the Third Way)’ ‘우리(We)’ ‘새 영국을 위한 새 노동당(New Labour, New Britain)’ ‘일하기 위한 복지(Welfare to Work)’ 따위 구호가 바로 이들의 머리에서 나왔고, 이들의 헌신적이고 전투적인 노력을 통해 노동당과 노동당 정부는 모든 언론의 머리 기사를 장악할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응집력 강한 공보 조직

1995년 이래 노동당은 언론을 대상으로 한 경쟁에서 보수당을 매일같이 압도해 왔다. 이들은 논쟁을 유발하고 그것을 주도했다. 1997년 정부에 입성한 후에도 성공 신화는 이어졌다. 적어도 지난해까지 노동당 정부는 그들의 의도를 영국 유권자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노동당 정부의 공보 조직은 영국 역사에서 가장 응집력이 강한 집단으로 평가되고 있다.

캠블은 정책(Policy)과 발표(Presentation)가 분리된 기능이 아니며, 하나로 이어진 과정 속의 연관된 부분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는 공보 조직을 통한 발표를 주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정책 결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유명한 아침 ‘9시 모임’을 주재하면서, 언론과 정부 내부를 상대로 투쟁해 왔다. 총리 관저에서 열리는 9시 모임은 캠블이 주재하고 총리실 핵심 요원과 노동당 정부 및 당의 핵심 간부들이 참석한다. 이 모임에서 노동당 정부의 전투 도형이 그려지고, 당면 과제에 대한 해결책이 제시된다.

블레어 총리의 가족을 제외하고 캠블만큼 블레어와 자주 긴밀하게 대화하는 사람은 없다. 캠블이 가진 장점 중 하나는 그가 언론의 생리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대중지 <데일리 미러>의 정치부 기자와 정치부장 그리고 지난 6년간 대변인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언론사 내부를 속속들이 파악하며 필요할 때마다 아주 거칠게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총리의 공식 대변인이지만, 자기가 하는 일이 언론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한다.
그는 정치부 기자들을 힘들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그가 정치부 기자였던 1980년대, 대부분의 언론은 당시 노동당 당수 닐 키녹을 거꾸러뜨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지금 신문들은 친노동당으로 변했지만 그는 언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영국에서의 정치 저널리즘은 하잘것없고, 썩었으며, 파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정치 보도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 하든지 약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이맘 때쯤 있었던 일화들은 그의 언론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개각설이 난무하던 어느 날 부총리 존 프레스콧이 블레어를 만났다. 그와 관련한 질문이 이어지며 기자실이 활기를 띠었다. 개각 방향에 반대하며 그가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얘기도 거론되었다. 캠블은 이를 평가절하했다. 왜냐하면 그날이 목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매주 목요일 만난다.” 이 말로 토니 블레어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그 중요성을 잃는다. 또 다른 질문이 제기된다. 개각설로 내각이 흔들렸다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캠블은 질문을 무시했다.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이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이 총리라는 점이다. 그는 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 정부를 끌어가고 있다. 총리는 지금 내각이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총리의 공식 대변인으로서 어떤 억측에 대해서도 내가 답변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신문기사 CD나 연설집으로 그들을 달랜다. 억측 기사를 쓴 기자를 위해 샴페인을 제안한다. 그는 정치부 기자단을 경멸하지만, 그들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다. 캠블이 기자들에게 한 브리핑은 타이핑되어 각 장관실과 정부 부처에 회람된다. 브리핑 자료를 보면서 장관들은 그들이 그날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게 된다.

하지만 좋은 날은 계속되지 않는다. 올 들어 블레어의 인기는 급락했다. 6월 중 여성단체 연설장에서 여성들이 블레어에게 보낸 야유는 충격적이었다. 이 사건 직후 행해진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이 보수당을 겨우 3% 차로 앞서고 있음이 밝혀졌다. 최근 들어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측근의 문제점이 폭로되고, 유로 가입을 둘러싼 내부 이견을 보여주는 문건 2개가 유출되었다. 의회에서 블레어가 심하게 더듬거리는 일이 발생했고, 그 직후 그의 큰아들이 만취한 상태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제 정치 대변인 집단들은 더 이상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블레어 인기 떨어지자 대변인 집단에 ‘화살’

최근 부총리 존 프레스콧은 왜 그들의 언론 장악력이 낮아졌는지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캠블에게 요청했으나, 캠블의 보고서마저 지난 7월9일 유출되었다. 내용 중 관심을 끄는 대목은, 어떤 경우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이 터지고 있기는 하지만,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정부의 메시지들은 유권자에게 잘 전달되고 있다는 평가였다.

캠블과 정치 대변인 집단이 각광받는 것을 놓고 전문가들은 그 근거를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내각이 취약하고 노동당이 절대 다수인 의회가 무기력하기 때문이며, 둘째 블레어의 절대주의적 정부 운영이 이런 조직을 필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캠블의 존재는 언어가 정치와 정부가 기능을 발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현실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정치의 차이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로 나타나게 되고, 정치적 투쟁은 많은 경우 그들이 사용하는 정치 용어의 차이로 대별되어 나타난다. 언어는 정치에서 핵심적 분석 대상으로 떠올랐고, 이러한 변화가 정치권·정부·언론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사와 총리 사이의 인터뷰는, 언론이 정치와 정부에 대해 묻고 답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정치적 사건이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권력 핵심의 홍보 기능 강화는 대의 정치를 무력화하고 중앙집권적 권력 행사를 강화하는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대의 정치의 발생지인 영국에서 진행되는 정치 대변인 집단의 ‘떠오름’이 대의 정치에 얼마만큼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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