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찌는 여름철 ‘프랑스는 없다’
  • 스트라스부르·류재화 통신원 ()
  • 승인 2004.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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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대다수가 바캉스 행…방송·신문도 ‘쉬엄쉬엄’
적막고요. 바캉스 철만 되면 프랑스는 ‘없다’. 거리는 텅 비고 모든 것이 정지한다. 학교도, 도서관도 모두 문을 닫는다. 모닝콜 대용으로 맞춰놓은 라디오 속의 디제이도 휴가 가고 없다. 매일 저녁 8시면 텔레비전에 어김 없이 나타나는 각 방송국 간판 앵커들도 한동안 사라진다. 프랑스 텔레비전은 7월과 8월 휴가철에는 거의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재탕삼탕’ 프로그램으로 하루하루를 넘긴다. 1980년대 미국 영화나 탐정 영화가 바캉스철의 단골 대타 프로그램들이다. 그래도 올 여름은 풍성하다. 아테네올림픽이 열리기 때문이다.

‘사고를 치려면 여름에 쳐라!’ 프랑스에서는 이런 문구가 유행한다. 기사 거리가 말라붙는 바캉스 철에는 소소한 사건도 ‘큰 뉴스’가 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일어난 조제 보베의 맥도널드 매장 신축 공사장 난입 사건은 한여름에 터졌다. 라르작 고원의 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이 작은 사건은 보통 때였다면 지방발 단신으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8월 바캉스철이었다. 기자도 없고, 기사 거리도 바닥난 시점에 터진 이 사건은 ‘역사적 사건’으로 비화했다. 이 사건 이후 조제 보베는 프랑스 언론의 ‘슈슈(귀염둥이·총아)’가 되었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지난해 여름 프랑스의 대표적 록그룹 ‘누아르 데지르’의 리드 싱어 베르트랑 캉타가 자신의 여자 친구인 영화 배우 마리 트랭티냥을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을 만한 사건이었는데도 언론은 간단하게 정황만 보도했다. 바캉스가 한창이던 7월에 발생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프랑스를 덮친 무더위는 살인적이었다. 수많은 노인이 죽었다. 당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바캉스가 다 끝나고서야 뒤늦게 구릿빛 얼굴로 나타났다. 이 ‘한심한’ 모습은 곧바로 ‘씹기 좋아하는’ 프랑스 언론의 표적이 되었다. 시사 풍자 인형극 ‘기뇽 드 랭포’는 정상 회담을 하기 위해 외유중인 대통령을 꽃무니 비치 남방을 입고 칵테일 잔을 흔드는 ‘놀새족’으로 비유하며 비꼬기도 했다. 병약한 노인들의 죽음은 프랑스가 난생 처음 겪은 무더위 탓도 있었지만, 바캉스와 개인주의 탓이기도 했다. 보건 의료진도, 부모를 보살펴야 할 젊은 자식들도 모두 떠나고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바캉스를 즐기기 위해 6월부터 서두른다. 캠핑 트레일러(캐러밴)·모빌 하우스 등 바캉스 장비를 서둘러 임차·예약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름철만이라도 집을 떠나 ‘노마드’(유목민)처럼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외국으로 튀지 못하면 최소한 시골 별장, 개울물 흐르는 캠핑 계곡, 모빌 집으로라도 잠자리를 옮겨야 직성이 풀린다. 파리 시는 올해로 3년째 바캉스 철만 되면 센 강가에 간이 해수욕장 ‘파리-플라주’를 개장하고 있다.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개장하는데 수익도 짭짤하다.
프랑스의 달력은 1월이 아니라 10월에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학교의 학사 일정은 10월에 한 학기가 시작해 바로 2학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6월이면 끝난다. 작 정당들도 6월 말이면 의정 활동을 평가하고 당분간 휴식기를 갖는다. 작가들의 신간 출간도 10월이 되어야 봇물을 이룬다. 프랑스의 10월은 긴 ‘여름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활동에 들어가는 출발점이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이 1년 내내 바캉스철만 기다릴 정도로 바쁜 것은 아니다. 짬짬이 휴일들이 있다. ‘예수님’과 ‘공화국’ 덕분이다. 예수님이 주신 부활절·승천절·성신강림축일·주현절·성탄절에다 공화국이 선사한 혁명 기념일·종전 기념일 등 휴일도 적지 않다.

프랑스 보통 샐러리맨의 유급 휴가는 한달 평균 2.5일, 1년 평균 5주 꼴이다. 여름 바캉스철에는 많게는 두 달 정도 쉬는 자영업자도 많다. 평상시에도 저녁 7시 이후면 상점들 대부분이 문을 닫는다. 프랑스에서 일 중독자는 천대받기 일쑤다. ‘인간의 3대 활동은 노동·수면·휴식이다. 이 세 가지 활동 시간의 면적을 균등하게 나누자’ ‘최저 임금보다 못한 월급을 받느니 차라리 정부가 주는 실업 수당이나 챙기면서 기생충처럼 살겠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의 가치보다 휴식의 가치를 우위에 두는 것에서 한 발짝 나아가 게으름을 찬양하는 ‘발칙한’ 발언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여름철 해산물 요리법을 뒤지다가 ‘홍합’을 검색어로 치면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홍합은 프랑스어로 ‘물(moule)’이다. 그러나 ‘물’은 ‘물러터진 얼간이’ ‘게으름뱅이’라는 뜻도 있다. 홍합을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물족의 연대 사이트가 제법 많다. 일하지 말고 놀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불온한’ 사이트들이다. 고등학생들이 만들어 놓은 몇몇 조잡한 사이트들은 ‘게으름뱅이가 공부하는 법’이라는 제목 아래 필기 잘하기로 유명한 친구들의 공책을 스캔받아 올려놓는다. 이들이 링크시켜 놓은 각종 사이트를 따라가다 보면 포르노 사이트를 만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프랑스에는 이처럼 게으름을 옹호하고 전파하는 사이트들이 많다. 인터넷 사이트 ‘물족(lesmoules.com)’은 자기네 정체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홍합이다. 우리는 접착력 강한 빨판으로 바윗덩어리, 지구 표면에 착 달라붙어 삶을 여유있게 누린다”. 바쁘고 건조하게 사느니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즐거움을 온전하게 누리겠다는 선언이다. 이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죽도록 일하는 벤처 기업 청년들의 일상은 악몽이라고 이죽거린다.

게으름 사이트들은 자칭 ‘하위 문화’ 혹은 ‘문화의 제로’를 지향한다. <노동 반대 선언> <내가 일한다고? 절대 안하지!> <젊은 실업자의 일상 생활> 등 각종 게으름 찬양 자료를 올려놓는가 하면, 나른하고 졸음 오는 ‘물 음악’ 계보를 만들어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는 존 레논과 세르주 갱스부르다. 이들은 게으름뱅이임을 당당하게 밝히라며 ‘물’이라고 적힌 티셔츠도 판매한다.

프랑스의 바캉스 문화에는 이처럼 게으름을 ‘악덕’으로 여기지 않는 프랑스인의 사고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때로 게으름의 도가 지나쳐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현상까지 목격되자 프랑스 사회 안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개의 프랑스인들에게 게으름은 여전히 ‘찬양’해야 할 대상이자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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