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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총성 없는 '유럽 대전' 승리

프랑크푸르트·허 편집위원 ㅣ 승인 2001.01.04(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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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니자 정상회의' 결과 분석/'유연성 원칙' 등 이용해 막강 권한 확보

사진설명 웃고 있지만 : 지난 10월13~14일 프랑스 비아리츠에서 열린 유럽연합 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 강대국과 약소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다.

"총성 없는 전투." 지난 12월 초 프랑스 남부 니자에서 열린 유럽연합 정상회의를 룩셈부르크 총리는 이렇게 평가했다. 밖으로는 유럽연합의 단결을 과시하는 연례 행사로 알려진 정상회의에서 이렇게까지 전운이 감돈 까닭은 무엇일까?

이번 정상회의는 1999년에 밝힌 동유럽의 가입 시점을 공식화하고 '21세기 유럽연합'의 청사진을 그린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동유럽국의 가입은 원조기금의 주요 수혜자인 남유럽 국가들이 반대하는 등 복잡한 사정이 있어 미루어져 왔지만, 더 늦출 수 없는 상태이다. 유럽연합은 북아프리카·중동·중앙아시아까지 자신의 세력권으로 포섭하고, 국제 무대에서 협상력을 높여 미국과 대등한 지위를 확보하려는 '냉전 이후'의 전략을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강대국 패권 싸움에 등 터지는 약소국

그러나 한 가족 15명이 새 식구 12명을 맞아들이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무엇보다 회원국이 많이 늘면 유럽연합 내부에서 이해 관계가 더욱 복잡해진다. 내부의 이질성이 커지면 대외적으로 효과적인 협상력을 갖추기 힘들다. 더욱이 현재 유럽연합 회원국은 거부권을 갖고 있다. 유럽연합에서 논의되는 의제 중 회원국의 주권에 민감한 문제는 회원국 전체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회원국이 늘어나 거부권 행사가 빈번해지면 유럽연합은 마비될 수도 있다.

유럽연합의 핵심국들은 정상회의에 대비해 이 문제를 다루는 실무 협상을 벌였다. 그들은 거부권이 인정되는 분야를 줄이고 다수결 합의를 확대한다는 기본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효과적인 협상력을 갖춘다는 구실을 대고 몇몇 강대국이 유럽연합을 주무를 가능성에 약소국들은 위협을 느끼고 있다. 더욱이 유럽연합의 최고 입법기구인 각료회의는 각 회원국의 발언권에 차등을 두고 있다(오른쪽 표 참조). 그 기준이 회원국의 국력인 만큼 경제력에서 서유럽과 비교가 안되는 동유럽은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다. 또 독일은 통일 후의 현실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더 많은 투표권을 요구했고, 여기에 프랑스가 '결사 반대'했다. 발언권 확보와 재분배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21세기 유럽연합에서 약소국들이 자국의 이해를 지키려는 싸움이며, 또 한편으로는 확대된 유럽연합의 패권을 겨루는 강대국들의 싸움이기도 하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프로디가, 정상회의를 앞두고 각국이 이기적인 계산을 버리지 않으면 기대할 바가 없다고 말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실제로 니자 협상에서는 막판까지 실패를 알리는 보도가 줄을 이었고, 프랑스가 각료회의 의장국 자격으로 내놓은 합의문 초안은 예정된 일정을 넘겨 네 번째 수정안을 거친 뒤에야 인정받았다. 시라크 대통령은 이 수정안이 '유럽의 정신이 담긴, 역사에 남을 기록'이라고 말했다. 비록 유럽연합의 역사에서 가장 힘든 협상이었으나 회원국들의 이해는 공정하게 보장되었다는 것이다. '니자 조약'으로 불리는 합의문의 전모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지금껏 알려진 내용을 보면 이런 평가는 사실과 다르다.

무엇보다 약소국의 발언권이 대폭 줄었다. 각 회원국이 할당받은 투표권을 보면 회원국 사이의 투표권 격차가 10 대 2에서 29 대 3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회원국의 거부권 축소와 함께 약소국의 발언권을 위협하는 더 근본적인 변화는 다른 곳에 있다. 이른바 '유연성'을 보장한다는 원칙이다. 이것은 특정 의제가 유럽연합에서 논의될 수 없을 때, 다시 말해 이 의제를 거부하는 회원국이 다수일 때 일부 회원국이 유럽연합 조약의 틀을 벗어나 이 의제를 먼저 논의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예를 들어 보자.

니자 회의를 앞두고 유럽연합 외무장관 회의는 신속대응군 구성에 합의한 바 있다. 프랑스는 정상회의에서 이 합의를 공식 승인하기 전에 새로운 제안을 덧붙였다. 유럽연합에 독자적인 군사령부를 둔다는 구상이다. 그러자 코언 미국 국방장관은, 니자 회의를 앞두고 열린 비공식 나토회의에서 유럽연합에 경고를 보냈다. 유럽이 나토로부터 독립할 수 없으며, 또 나토와 중복되는 기능을 맡아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구상은 영국이 반대해 니자 조약에는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독일이 선거를 앞두고 있는 블레어의 체면을 살려준 것이며 군사령부 구상은 계속 협의하게 된다. 바로 '유연성'이라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이미 3년 전 암스테르담 조약에서 채택되었지만, 그 때는 '일부 회원국이 협의할 경우에도 전체 회원국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니자 회의는 바로 이 '전체의 동의'라는 조건을 '과반수 동의'로 바꾸었다. 따라서 군사령부 구성은 영국이 반대해도 프랑스·독일 등 일부 회원국이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슈뢰더 독일 총리가 지난해부터 '유연성 원칙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한 배경에는 이같은 안보전략이 있다. 유럽연합에는 유럽의 군사화에 반대하여 군사령부 설치를 거부하는 나라도 적지 않다. 덴마크는 유럽연합의 신속대응군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유연성 원칙은 미국이 나토를 통해서 유럽에서 누리고 있는 이권뿐만 아니라 유럽의 군사화에 반대하는 나라들의 거부권도 위협하게 된 것이다.


니자 조약, 유럽 분열 초래할 수도

니자 협상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회원국의 인구를 이중으로 고려한다는 조항이다. 예를 들어 각 회원국의 투표 수는 인구에 비례한다. 그런데 독일만은 이 원칙에서 제외되어 여전히 프랑스와 같은 수준이다. 투표 수만 보면 독일이 프랑스에 꺾인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 어느 의제가 유럽연합의 결의로 인정받으려면 가중 다수표(73.5%)를 얻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전체 회원국 인구 62%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조항이 붙어 있다. 따라서 독일은 영국과 이탈리아 두 나라의 지원만 받으면 프랑스가 지지하는 어떤 현안도 거부할 수 있다. 반면 프랑스는 영국·이탈리아·독일 세 나라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어떤 안건도 관철하지 못한다. 독일은 투표 수에서는 프랑스에 양보했지만 사실은 '62% 조항'을 통해서 프랑스를 무시할 수 있는 발언권을 확보한 것이다.

유럽 신문들은 니자 협상 결과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독일, 프랑스와 벌인 한판 승부에서 승리'(이탈리아 <라 레푸블리카>) '프랑스, 독일이 유럽연합의 최강국임을 인정'(스페인 <엘 파스>) '독일, 외교 이익 지키는 완충 지대 확보'(영국 <데일리 텔레그라프>). 그렇다면 니자 협상에서 "우리가 바란 것은 다 얻었다"라고 독일 외교관이 말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독일은 '동독 통합'에 이어 10년 만에 '동서 유럽 통합'에서도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 승리가 독일의 힘(경제력)과 약소국의 발언권 축소에 기초를 둔 것인 만큼 니자 조약이 유럽의 분열을 재촉할지 모른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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