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그린스펀에 '애끊는 구애'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1.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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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취임 때맞춰 미국 경제 둔화 조짐…'추가 금리인하' 호소

사진설명 얘기가 통했을까 : 지난해 12월18일 회동한 부시와 그린스편. 부시는 싱글벙글 웃었지만 그린스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1월20일 제43대 미국 대통령에취임하는 조지 W. 부시 당선자는 요즘 골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8년째 호황을 구가해온 경제가 공교롭게도 자신의 취임에 때를 맞춘 듯이 둔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때문이다. 연간10조 달러 규모인 미국 경제에서 한 축이되는 제조업은이미 침체 국면에 빠져있다. 1992년 11월 대통령이던 부친이 대선에서 당시 민주당빌 클린턴 후보에게 어이없이 패한 것도바로 경기 침체 때문이었다.

지난해 섣달 중순께 부시 당선자가 워싱턴에 오자마자 가장 급하게 찾은 사람은바로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었다. 지난 8년간 경제를 전례 없는 호황으로 이끈주인공을 만난 자리에서부시는 야심 찬 감세 계획을 설명하고지지를 호소했다. 부시의 감세 계획이란 앞으로 10년에걸쳐 축적될재정 흑자 5조달러 가운데 1조6천억달러를 떼어내 기업과 가계의 세 부담을덜어 주겠다는 것이다. 부시가그린스펀을 만난 자리에서금리 인하를요청했는지확인되지 않았지만, 정황으로 보아 그랬을가능성이 농후하다. 회동이 끝난 뒤 부시는 다소엉거주춤한 그린스펀의 등을 연신두드리며 싱글벙글했다. 물론그 순간 그린스펀은 입을굳게 다문 채아무 말이 없었다.

부시는 사실 경기진작을 위해그린스펀이 금리 인하에 관해한마디 해주기를 바랐지만,정치적 외풍을 타지 않기로 유명한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때문에 경기 둔화 처방책을 놓고 차기 대통령 부시와 '경제 대통령' 그린스펀 간에 '샅바싸움'이 시작된 것아니냐는 관측도 나돈다. 사실 정치적 인기에 영합해 경제를 왜곡하려는 역대 대통령의 간섭을 누구보다 배척해온 사람이 그린스펀이었다. 특히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최대의 무기인 금리 정책에관한 한 그린스펀은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통해 왔다.


연초 금리 인하는 순전히 '경제적 이유'

그런데 두 사람이 회동한지 약 보름후인 지난 1월3일 부시를 깜짝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리를 0.5%나 내린 것이다. 금리 인하는정회원 12명을 둔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결정하는데 최종 결정권자는 의장인 그린스펀이다.따라서 당시 대폭적인 금리 인하 폭을 놓고 혹시 그린스펀이 부시를 꽉 틀어쥔 샅바를 다소 풀기로 한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말하자면 감세를 통해경기 진작을 꾀하겠다는부시를 돕기로하지 않았느냐는 관측이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면 꼭그런 것같지는 않다. 그린스펀이 금리를 전격 인하하기로 결정한 것은 순전히 경제적이유라는 것이다.즉 현재 경제 둔화 속도가 예상 외로빠르자 그린스펀나름의 노련한판단이작용했다는 관측이다. 그린스펀은 지난해 5월 이후 최근까지 0.25%씩무려 여섯 차례나금리를 인상했다.그 덕에 금리는 무려 6.5%에 달했다. 이처럼 금리를 연달아 인상한 결정적 이유는 경제가적정 성장률인 2.5%를 넘어 5%대에 근접하며인플레를일으킬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물론 불과 1년 사이에 1.5%나 금리를 올린 것은 경기 과열단속치고는 너무 극단적인 처방이 아니냐는 비난도 일었지만 그린스펀은 꿈쩍도 안했다.

그렇다면 그린스펀은 현재의 경제 상황을 침체라고 단정하고 적극적인경기 부양쪽으로 가닥을 잡았을까. 경제전문가들은 꼭 그렇게만은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임박한 침체를 막기위해 미리 손을 쓴 예방적 조처일 가능성이 더크다고 본다. 여기에는 1990년대 초 금리 인하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경기 침체를막지 못한 데 대한 그린스펀 자신의 뼈아픈자성이 깔려 있다는 지적이다. 즉 부시 공화당 행정부 초반인 1989년 하순 그린스펀이 이끄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경기 진작을위해 잇달아금리를 내렸다. 문제는 금리 인하 시기가 늦은 데다가당시 상황이 경기 둔화가 아니라경기 침체여서 금리를 대폭 인상할 필요가 있었다. 신중파인 그린스펀은 소폭인하를 택했는데, 결과적으로 경기 침체가본격화했다. 1990년 여름부터 시작된 침체는1992년 여름까지지속되었고, 클린턴이 대통령에취임한 이후인 1993년여름에야 비로소 회복기를맞았다. 올해로 재임 13년째인 그린스펀(74)은 당시의 판단을 일생 최대의 실수로 간주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지난 1월3일 그린스펀 의장이 금리를0.5%나 내린 것도 과거의 실수를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독하게 결심한 때문으로 풀이한다.

경기 둔화 또는 침체를 이겨내는가장 좋은 정책적 수단은 감세보다는금리 인하라는데 경제학자들의 생각은대개일치한다. 감세에 따른 경기 진작 효과가 나타나려면시일이 오래 걸린다. 때문에 금리 인하가 단기적으로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 열쇠는 그린스펀이 쥐고 있는 셈이다.


부시·그린스펀 손잡을 가능성 높아

부시는 그런 점에서 우군이 많다. 우선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인 래리 린제이는 과거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사를 지냈고그린스펀과도 절친하다. 린제이는 감세는 곧 경기 진작의 촉매제라고신봉하는감세주의자다. 또 부통령 당선자인 딕 체니와 폴오닐 재무장관내정자 역시 1970년대중반 공화당의제럴드 포드 행정부 시절 그린스펀과 함께근무한 적이 있다. 이들은 그린스펀을 상대로 금리 인하를 유도하도록 총력전을 펼칠 태세다. 더욱 가관인 것은, 대선에서 패배한 원인을 경기 침체탓으로 돌려온 부시 전 대통령마저요즘 그린스펀과 화해를 하려고나섰다는 점이다. 부시부자가 모두 그린스펀의소매를 붙들고경기 진작을 호소하는 형국이다.

그린스펀이 이들의 '구애 작전'에순순히 응할까? 그린스펀은 재정 흑자에서 생긴 돈을 나라 빚을 값는 데 우선 써야 한다는민주당 쪽과 비슷한 생각이다.지난해에 의회 청문회에 여러 차례 출석해서도 그는 '재정 흑자를 감세로 전용하기보다는 국채를 값는 데 써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 상황이
달라진 만큼 그도 재정 흑자의 일부를 경기 진작에 활용해야 한다는부시측 논리를두둔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린스펀이현재의 경제 상황을 감안해 추가 금리 인하를단행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문가들은진단한다. 우선 구경제의 기수 격인 제조업 분야가 이미 침체 국면에 들어선 것이 그린스펀에게 여간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예로 미국최고의 사무기기 판매사인 오피스 데포와 최대의 종합 백화점인시어스도 전국적으로 수십 군데 폐업을 선언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백화점 판매량이 재작년보다 크게 줄어든 것 역시 적신호다.

경기 둔화는 한때 15,000대를넘어 20,000대를 치닫던다우존스 종합주가가현재 10,000 선에서 맴돌고 있는 데서알 수 있다. 신경제의 첨단주들이모인 나스닥주가 역시한때 5,000을 바라볼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지금은2500대 주변을 맴돌정도로 침체를벗어나지못하고 있다.한마디로구경제·신경제 모두 성장의 기세가 꺾인 채 조정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다. 때문에경제학자들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지난해의 5%보다 1∼2%낮게 잡고 있다. 이처럼 어려운경제 사정 때문에 그린스펀이나 부시 모두명분 없는샅바싸움을 지양하고 손잡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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