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재판에 어린 '거대한 음모'
  •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
  • 승인 2001.07.1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밀로셰비치 압송해 유고연방 해체 유발…"나토 침략 합법화 기도"


지난 6월28일,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이 헤이그로 압송된 사건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그것은 나토가 밀로셰비치 압송을 왜 그리 서둘렀는가 하는 점이다.


나토는 유고 헌법재판소가 밀로셰비치를 압송한다는 연방 정부 방침이 헌법에 저촉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해석한 바로 그 날, 영국 군용기와 호위용 전폭기를 동원해 밀로셰비치를 압송했다. 헌법재판소의 결론이 나오기 전에 치밀하게 준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작전이다. 물론 압송 날짜를 서방의 '유고 지원 회의'(6월29일)에 맞춘다는 의미는 크다. 하지만 지난해 10월만 해도 나토는, 헌법재판소가 선거 결과를 둘러싼 판결에서 밀로셰비치의 패배를 인정하자 유고연방이 이제야 법치 국가가 되었다고 찬사를 보냈고, 코스투니차 신임 대통령을 민주 혁명의 기수라고 추켜세웠다. 더욱이 헌법재판소 판사나 코스투니차 대통령이 압송 자체를 거부한 것도 아니다. 단지 법적인 절차를 밟겠다는 것이었다.




나토는 '유고 민주화'의 주역으로 인정한 상대를 여섯 달 만에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유고연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연방이 해체되는 것도 시간 문제가 되었다. 밀로셰비치 압송 작전에서 조역을 맡은 진지치 세르비아 정부 총리는 이제 몬테네그로 분리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헝가리계 소수 민족이 사는 세르비아 북부 보이보디나에서도 분리 움직임이 일고 있다.


연방 해체가 앞당겨질 때 나토가 얻는 이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러시아는 발칸에 남아 있던 마지막 동맹국을 잃게 되어 발칸의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물러나야 한다. 이것은 나토를 중앙아시아로 확대해 러시아를 압박하려는 군사 전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초 작업이다. 또 코소보 문제가 '부드럽게' 해결된다는 이점도 있다. 코소보는 국제법적으로는 유엔 결의안 1244조에 따라 여전히 유고연방에 속한다. 나토는 이 결의안에 따라 알바니아계 게릴라(UCK)의 무장을 해제할 의무도 안고 있다. 그러나 알바니아계 게릴라는 무장 해제는커녕 세르비아 남부와 마케도니아 수도까지 육박하는 군사 작전을 벌이며 코소보 독립과 알바니아계를 통합한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게릴라의 군사 작전을 묵인·방조하고 있는 나토에게 유엔 결의안 1244조는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이다. 유고연방 해체는 곧 이 결의안의 효력 소멸로 이어진다.


게릴라 무장 해제를 포기한 나토에는, 무력에 의한 국경 변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헬싱키 선언도 적지 않은 부담이다. 나토는 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 게릴라가 무력으로 새 국경선을 긋는 데 한몫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유고연방이 먼저 해체되고 코소보가 독립하는 순서를 밟으면 나토는 헬싱키 선언을 위반하고 있다는 비난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유고연방 해체는 곧 세르비아 영토 축소를 뜻한다. 몬테네그로 분리는 아드리아 해로 열린 통로를 막게 되며, 보이보이나가 독립할 경우에는 곡창지대를 잃게 된다. 밀로셰비치를 헤이그에 넘긴 대가로 서방의 지원 자금이 흘러든다 해도 영원한 채무국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 때 게릴라의 교란 작전에 맞서기 어렵게 되면 나토는 세르비아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주둔하게 될 것이다. 반(反)세르비아 무장 조직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내전이 확대되면 바로 이들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평화유지군으로 나선다는 것은, 유고연방이 축소될 때마다 나토가 군사 주둔 지역을 확대하면서 사용해 온 '공식'이다. 최근 마케도니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이같은 공식의 결정판이다. 마케도니아는 코소보 전쟁 때 나토가 후방 보급 부대를 주둔시킨 곳이다. 세르비아와 달리 나토와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었고 알바니아계와 민족 분쟁도 없던 곳이다.


마케도니아에서는 미군이 게릴라 교관




그런데도 이곳은 알바니아계 게릴라가 침입하자 내전 위기에 빠져 있다. 마케도니아 시민들은 나토가 정부의 맹반격에 퇴각하는 게릴라를 호위하면서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개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함부르크에서 발행되는 독일 일간지는 퇴각하는 게릴라 무리 속에 퇴역 미군 장교 17명이 끼어 있는데, 이들이 게릴라 교관으로 활약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미군이 게릴라를 호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연합이 파견한 마케도니아 특사는 알바니아계 게릴라를 정치협상 상대로 인정하라는 발언을 하루 만에 번복하기도 했다. 마케도니아 정부가 그를 '기피 인물'로 못박아 입국을 금지한다는 반응을 보이자 일어난 희극이다. 이제 마케도니아에도 주둔하게 되는 나토는 알바니아계 게릴라가 자발적으로 무기를 반납할 경우 그 무기를 접수하기 위해 주둔할 것이라고 말한다. 코소보 주둔 나토군 4만명이 손도 못댄 게릴라 무장 해제, 그것이 마케도니아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제법 학자들은 유고 전범 재판은 나토의 발칸 전략에 못지 않게 문제를 많이 안고 있다고 말한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이 재판이 정치적인 독립성을 의심받고 있다는 점이다. 전범재판소 설립은 1993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이 주도해 결의한 것인데, 이 때는 유고 정부뿐만 아니라 유엔 사무총장이 이의를 제기했다. 전범재판소는 안보리 결의가 아니라 유엔 전체 회원국이 동의하는 국제 조약을 통해서 세워야 한다는 제안이다. 안보리는 유엔 헌장 7장에 따라 '국제 안보를 유지, 회복하는 평화적 제재 조처로 전범재판소를 구성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많은 법학자들이 전범재판소 구성은 안보리가 주도할 권한이 없다고 말한다. 램지 클라크 전 미국 법무장관은 일찍이 전범재판소가 미국에 비타협적인 세력을 범죄시하는 정치 도구가 될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전범재판소 검찰, 나토 '민간인 학살' 혐의는 무시




이런 지적이 타당하다는 한 가지 사례로 바로 밀로셰비치 재판을 들 수 있다. 전범재판 담당 검찰이 코소보 알바니아계 주민 5백77명을 학살한 책임이 있다는 혐의를 들어 그를 전범으로 기소했다. 같은 기준으로 보면 나토가 유고를 공습한 것도 당연히 문제가 된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나토의 공습으로 민간인이 희생된 90가지 사례를 조사해 검찰측에 보낸 바 있다. 검찰측은 이 보고서에 담긴 사례가 전쟁 범죄를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가 안된다는 답을 보내왔다. 나토가 알바니아계 난민 대열과 민간 열차, 베오그라드 방송국과 중국대사관을 폭격한 사례를 검찰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변호사연맹이 나토의 전쟁 범죄를 기록한 보고서에 대한 검찰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검찰은 그것도 몇번에 걸친 독촉을 받고서야 '공식적인 수사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보고서는 곧 검토하게 될 것'이라는 답을 보냈다. 그 검토는 곧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밀로셰비치의 전범 혐의를 보스니아전쟁으로 확대한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보스니아 전쟁에서 회교도측, 특히 보스니아 대통령의 측근이 관련된 양민 학살에 관해서는 나토나 유엔 모두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검찰이 당시 회교도 전범에 눈 감은 이유를 해명하지 않고 밀로셰비치의 범죄만을 입증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보스니아 전쟁에서 나토는 베트남 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공습 작전을 벌여 크로아티아군을 지원했다. 크로아티아 남부 크라이나에서 수백 년 동안 살고 있는 세르비아계 주민 약 20만 명이 이때 추방되었다. 크로아티아 텔레비전이 베트남전의 참상을 방불케 하는 생생한 장면을 보도한 바 있다. 전범 재판이 과연 이 작전의 책임자들을 그대로 두고 밀로셰비치를 기소할 수 있을지 이것도 주목할 만하다.


전범재판소는 재판 절차에서도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전범으로 지목되어 체포 대상에 오른 인물 중 일부는 그 신상이나 범죄 혐의를 비밀에 부친다는 것이다. 변호사가 도발적인 자세를 보인다고 판단하면 변호를 중단시킬 수 있다거나, 검사가 판사의 동의를 얻어 특정 증거나 재판 자료를 변호사에게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규정도 피고인의 방어권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독소 조항이다.


유엔 분담금 안내는 미국, 전범재판소에는 '거금'




전범재판소 운영 자금은 유엔이 댄다. 그런데 유엔 분담금을 안 내기로 유명한 미국이 전범재판소에는 수백만 달러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바니아계에 자금을 대는 것으로 알려진 조지 소로스와 록펠러 재단도 기부인 명단에 들어 있다. 전범재판소는 이들 기부인들의 입김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전범재판소는 개별 국가의 내정에 개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이중 처벌'이 가능하다는 조항이다. 예를 들어 어느 개별 국가에서 진행 중인 전범 재판이 미흡하다고 판단될 때 헤이그 재판소는 어느 때라도 피고를 넘겨 받을 수 있다는 조항이다. 이와 달리 개별 국가가 헤이그 재판에 개입할 수는 없다. 흔히 유엔 전범재판소는 앞으로 설립되는 국제 형사재판소의 모델이라고 한다. 국제 형사재판소가 '이중 처벌' 조항까지 포함하게 되면 그때는 어떤 전쟁 범죄나 독재자도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세상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전범 재판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을 때 이런 기대는 환상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독일 법학자 훔머의 조언은 귀기울여 볼 만하다. 그는 나토가 어떤 구실을 내세운다 해도 유고 공습이 고전적인 침략 전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나토가 침략 전쟁을 일종의 관습법으로 정착시키려고 시도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관습법은 기존 법을 무시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되풀이할 때 인정받게 되는 것인데, 나토는 바로 오래 전부터 침략 전쟁을 전략 개념이라며 관철하려고 준비해 왔다는 것이다. 나토가 유고 공습 중에 이른바 '위기 관리'라는 전략 개념으로 전세계 분쟁에 개입한다는 방침을 확정하고, 유럽연합도 같은 해에 이와 유사한 전략을 공식화한 것을 모두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고 전범 재판은 그가 말한 대로 나토나 유럽연합이 침략 전쟁을 관습법으로 만들고 제3국이 내정에 개입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절차라고 보아 주목할 만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