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이즈미 고집이 '공황' 몰고온다
  • 도쿄·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2001.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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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외면한 '외곬 개혁 정책' 실패 조짐…전세계 '불안'


지금 일본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70% 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역대 총리와는 달리 가차 없는 구조 개혁을 외치고 있어서이다.




그러나 최근 주가지수가 17년 만에 11000 대로 떨어지고, 실업률까지 사상 처음으로 5%를 넘어서자 고이즈미 총리의 '외곬 개혁 정책'에 의문 부호를 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경제 현실을 도외시한 그의 외곬 개혁 정책이 실패할 경우 일본 경제는 타이태닉 호처럼 순식간에 침몰할 위험이 있으며, 그 여파로 세계 경제가 이른바 '고이즈미 공황'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그것이다.


지난 8월29일 오후 도쿄 가부토 죠의 증권회사 객장에서 시세판을 쳐다보던 투자자들은 닛케이 주가지수가 11000 이하로 내려가자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일본의 주식 투자자들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주가의 마지노 선은 13000 대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성역 없는 구조 개혁을 외치는 고이즈미 정권이 등장한 이후 주가는 오히려 하락을 거듭해 12000, 11000 대를 차례로 깨고 이제는 10000대를 위협하고 있다. 만약 주가지수가 10000대 아래로 내려가면 일반 투자자는 물론 일본 경제 전체에 미칠 충격파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날 것이다.


경제 파탄 위기에도 '낙관론'만 펼쳐


일본의 금융 전문가들에 따르면, 일본의 주가가 이처럼 충격적으로 하락하는 1차 원인은 세계적인 정보기술(IT) 산업 불황에 있다. 그러나 근본 원인은 고이즈미 내각의 구조 개혁 정책에 대한 불안이다.


예컨대 고이즈미 내각이 내건 구조 개혁의 중심 테마 중 하나는 경기 회복을 가로막고 있는 금융기관의 막대한 부실 채권을 2∼3년 안에 모두 털어버린다는 것이다. 부실 채권 처리를 맡은 야나기사와 하쿠오(柳澤伯夫) 금융 담당 장관은 8월28일 15개 대형 금융기관 부실 채권 잔고를 2004년 이후 7조∼10조 엔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금융 전문가들은 이같은 부실 채권 처리 계획이 대형 금융기관의 부실 채권을 해결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일본 경제 회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본다.




고이즈미 내각의 구조 개혁 시간표를 짜고 있는 경제재정자문회의도 내부 저항 세력의 압력과 반발로 이른바 '개혁 공정표' 발표를 뒤로 미루고 있다. 이 때문에 증권 시장에서는 고이즈미 내각이 구조 개혁 일정표를 짜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분석한다. 시간을 질질 끌다 보면 구조 개혁 자체가 물 건너 갈 위험성마저 있다. 이런 불투명한 시점에서 주식을 사려는 사람보다 팔려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7월 실업률이 5%를 기록한 것도 큰 충격이다. 일본 총무청이 지난 8월28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7월 실업률이 6월보다 0.1% 포인트 늘어났으며, 조기 퇴직자 등 자발적인 실업자도 15만명이 늘어난 1백14만명을 기록한 것으로 밝혀졌다. 문제는 세계적인 IT 산업 불황으로 실업자가 앞으로 계속 늘어나리라는 데 있다. 예컨대 일본의 대표적인 컴퓨터 회사인 후지쓰는 지난 8월20일 올해 안에 사원 1만6천4백명을 감원하고 4천7백명을 전환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IT 산업 불황은 일본의 대표적인 수출 업체인 가전업계를 직격했다. 도시바는 최근 1만7천명을 감원한다고 발표했으며, 히타치는 2만명을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가족적 경영'의 대명사로 불렸던 마쓰시타 전기도 만명 이상을 직장 내에서 전환 배치한다고 발표했으며, 세계적인 첨단 기업 교세라도 전체 사원의 약 20%에 해당하는 만명을 감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주가가 폭락하고 실업자가 늘어나는데도 고이즈미 총리는 '경기 회복보다는 구조 개혁이 먼저'라는 자신의 공약을 굽히지 않고 있다. 주가가 11000 대를 깬 지난 8월29일 그는 "날마다 주가의 움직임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으며, 자본 시장에도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라며 자민당 일각에서 제기하는 주가 대책 마련을 거부했다.


그는 또 구조 개혁에 따른 아픔을 참아내면 2∼3년 후에 일본 경제가 크게 회복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계속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구조 개혁 정책에 따라 실업 위기에 몰리는 당사자들은 아픔을 겪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게 된다.


경제산업장관, '고이즈미 정책'에 반기 들어


그래서 고이즈미 내각의 일원인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赴夫) 경제산업장관은 구조 개혁과 경기 대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지만, 우선 5조 엔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경기를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며, 자신이 속한 내각의 '선 구조 개혁, 후 경기 회복'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자민당 아소 다로(麻生太郞) 정조회장도 '선 경기 회복, 후 구조 개혁' 주장에 적극 동조하고 있다. 그는 재정 적자를 단계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신국채 발행액을 연간 30조 엔으로 제한하겠다는 고이즈미 내각의 방침을 비판하면서, "4∼6월의 경제성장률도 좋지 않지만 7∼9월에는 더욱 악화할 것이 분명하니 경기 안정을 위해 30조 엔 틀에 구애되지 않고 추가경정예산을 대폭 늘려 편성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고이즈미 내각의 구조 개혁 정책을 정면에서 비판해 온 이른바 '저항 세력'의 대표 주자인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 자민당 전 정조회장은 자신이 '저항 세력'이 아니라 '제언 세력'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경제 현실을 근거로 구조 개혁보다는 경기 회복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어째서 저항이냐고 항변하면서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주장하고 있다.


고이즈미 내각의 '선 구조 개혁, 후 경기 회복' 정책을 비판하는 세력들은 구조 개혁 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그랜드 디자이너'나 다름없는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경제재정장관에 대해서도 비난을 퍼붓고 있다.


다케나카 장관은 일본개발은행을 거쳐 미국 하버드 대학 준 객원 교수와 게이오 대학 교수를 지내다 고이즈미 총리의 경제 참모로 발탁되어 입각한 민간인 출신 각료이다. 그는 일본 경제 재생의 주역으로서 IT 산업을 지목해 왔다. 즉, 구조 개혁에 따른 경기 침체를 IT 산업의 성장으로 막아내고, 기업 도산으로 발생하는 실업자도 IT 산업에 흡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IT 산업 불황 여파로 후지쓰·NEC·도시바·히타치 같은 대기업이 대량 감원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IT 산업에 의한 경제 재건'이라는 다케나카의 구상은 이미 파탄을 맞았다고 비판 세력들은 주장한다.


IT 산업에 의한 경제 재건 구상이 파탄을 맞았다면 대안은 있는가. 최근 대두하는 것이 바로 '인플레 타깃론'이다. 인플레 타깃론이란 인플레율의 목표를 결정해 그것이 달성될 때까지 중앙 은행이 자금 공급을 늘려 가는 경제 정책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뉴질랜드·캐나다·영국이 실시한 적이 있는, 고율 인플레를 억제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역으로 디플레를 퇴치하는 수단으로 인플레 타깃 정책 도입이 검토되고 있다. 자민당 일부 의원들은 지난 7월 중순 하야미 유(速水優) 일본은행 총재에게 공개 토론을 제의하면서, 통화 공급을 늘리기 위해 일본은행이 즉각 장기 국채와 주식·토지를 대량 구매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통화량 증대에 따라 물가상승률이 인플레 목표치인 3% 정도로 올라가면 세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6백60조 엔에 달하는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빚이 대폭 줄어들고, 주가와 토지 가격도 상승해 금융기관의 부실 채권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거액 부채에 허덕이는 건설회사나 유통업계도 재건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인플레 타깃론은 일본은행의 제로 금리 정책 부활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회복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데서 나온 극약 처방이다. 그러나 중앙 은행이 실제로 인플레율을 조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만약 인플레율 조정에 실패할 경우 그 부작용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그래서 일본은행은 인플레 유도 정책은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하면서 "고이즈미 개혁으로 불황이 심해질 것이 분명하자 경기 대책에 유효한 수단을 찾지 못하고 있는 다케나카 장관과 재무성이 그 책임을 일본은행에 전가하려는 음모이다"라고 일축했다.


'구조 개혁이 먼저냐 경기 회복이 먼저냐'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유사한 논쟁이다. 사이타마 대학 아이자와 고에쓰(相澤幸悅) 교수는 고이즈미 총리가 세계 경제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구조 개혁을 고집함으로써 '고이즈미 공황'이 발생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구조 개혁 없이는 경기 회복이 없다는 고이즈미 총리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혁만 제대로 추진하면 경기가 저절로 회복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반대로 공황과 맞먹는 커다란 경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라고 충고한다.


일본발 세계 공황이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는 이전부터 있어 왔다. 고이즈미 정권의 외곬 구조 개혁이 파탄하면 그럴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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