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테러 왕’이 되다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dwj@sisapress.com)
  • 승인 2002.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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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해상 자살특공대 출몰 비상…선박 약탈 등 전통 노략질도 늘어


영국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은 해적 이야기를 다룬 소설 〈보물섬〉을 써서 일약 유명 작가가 되었다. 그는 당시 회자되던 해적 괴담을 미지의 섬과 진귀한 보물 등 낭만적 모티브와 연결해 독자를 매료했다. 그런데 스티븐슨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무시무시한 해적떼들이 오늘날에도 바다를 누비고 있다.



얼마 전 국제해양국은 충격적인 통계 자료를 발표했다. 해적 출몰 지역이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피해 건수도 지난해에 비해 무려 30% 이상이나 증가했다는 것이다. 과거 인도네시아의 말라카 해협, 인도양, 남·동 아프리카 근해, 남중국해 등 인도양과 태평양을 무대로 암약하던 해적들이 최근 아프리카 서부 지역인 리비아·나이지리아 해역과 홍해, 심지어 남아메리카 아마존 강으로도 활동 무대를 넓혔다. 출몰·공격 횟수도 날로 증가하고, 이로 인한 재산과 인명 피해가 속출해 올해 들어 선박 87척이 약탈당했고, 20명이 넘는 선원들이 실종되어 생사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해적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도 등장할 정도로 오래된 ‘직업’이다. 고대 지중해를 무대로 선원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 넘긴 킬리키아 해적이나, 중세에 대서양을 주름잡던 바이킹 해적, 근대 상업자본 시기에 보물선을 약탈하던 해적 등은 유명하다. 19세기 말 해적이 완전 소탕될 때까지 폐해는 막심했다.



‘21세기 바다의 무법자’ 이데올로기 해적들

동양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한(漢) 대에 ‘홍의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장백로나 일본 막부 시대에 조선 남해와 중국 동부를 노략질하던 왜구들은 역사에 악명을 남겼다. 해적사(史)에서 이슬람 해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페르시아 해협을 중심으로 활동한 ‘자와스미’ 해적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자와스미는 이슬람어로 ‘생업은 해적, 낙(樂)은 살인’을 의미한다.



오늘날 국제법은, 해적을 ‘공해상에서 국가의 명령이나 위임을 받지 않고, 사적인 목적으로 선박·선원을 약탈·폭행하며 해상 항행 질서를 해치는 집단(개인)’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해적은 인류의 공적(公敵)으로 간주되며, 각 주권국은 해적(선)을 임의로 체포(나포)해 국내법에 따라 처벌할 권리를 갖고 있다.



세계 대양을 누비는 해적은 일반적으로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부류는 과거 선배들의 맥을 이은 ‘전통 해적’이다. 둘째 부류는 특수 업종의 어선이나 상선 또는 밀수선을 노리는 일명 ‘밀렵꾼 해적’이다. 이들은 바다 지리에 밝고 체계적으로 잘 조직되어 있다. 어부들이 잡은 값진 어류를 강탈하거나, 미리 점찍었던 특수 상품을 약탈하기도 하고, 공해에서 거래되는 무기·마약과 같은 밀수 상품을 가로채는 약삭빠른 해적이다. 셋째 부류는 극단 테러주의자들인 ‘이데올로기 해적’이다. 이들은 노략질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만 관철하려고 한다. 이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선박 납치·약탈은 물론 살인조차 거리낌없이 저지른다.





전통적 해적의 표적은 상선이며, 이들은 화물·개인 재산·돈을 노린다. 과거 해적들이 곡물·귀중품·도자기 같은 상품과 노예로 팔아 넘길 기운 센 선원들을 표적물로 삼았던 데 반해, 요즘 해적들은 상선들에 선적된 대형 컨테이너를 노린다. 한편 선박의 규모가 대형화되어 상선과 해적의 싸움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지난해 해적의 습격을 받은 지 1년 만에 발견된 파나마 상선에는 격렬하게 싸운 흔적과 선원 21명의 시신이 남아 있었다.



밀렵꾼 해적들은 최신 첨단 군사장비로 무장하고 있다. 이들은 공권력을 매수해 입수한 정확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목표물을 신속하게 습격해 노획과 동시에 재빠르게 잠적하는 수법을 쓴다. 발각될 경우에는 무력으로 반격하면서 눈치껏 도주하기 때문에 이들을 생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만에 하나 붙잡힌다 해도 이들 배후에 있는 강력한 비호 세력이 해당 관료를 구워삶아 풀려난다고 한다. 이들은 북해·동남아시아 지역·카스피 해 등지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9·11 사태 이후 초미의 관심사는 이데올로기 해적들의 동향이다. 특히 상선으로 위장한 알 카에다 조직 세포들이 자살특공대를 보내 목표 선박을 습격할 가능성은 농후하다. 수년 전 알 카에다는 예멘의 아덴 항구에 정박했던 미국 해군 콜 구축함에 자살특공대를 투입해 미국 해군 17명이 사망하고 군함이 파손되는 손실을 입혀 세계를 경악케 한 경력이 있다. 당시 모로코 당국은 알 카에다가 지브롤타 해협에서도 유사한 음모를 획책했다고 밝혔다. 알 카에다 이외에 해상 테러에 일가견이 있는 팔레스타인 극단주의 조직도 경계 대상이다.



핵연료 운반선이 표적 될 가능성



과연 이데올로기 해적은 무엇을 표적으로 삼을까? 유조선과 핵연료 운반선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 중국은 알 카에다가 인도네시아 해역을 통과하는 유조선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해 촉각을 곤두세웠었다. 1999년 일본으로 핵연료를 운송하던 영국 선박들은 해적들의 어뢰 공격으로 배가 침몰하거나 알 카에다와 같은 해적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며 회항하기도 했다. 9·11 사태 이후 이러한 우려는 더욱 커졌고, 핵연료 운반선은 1990년대 초처럼 군함과 헬리콥터의 호위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했다. 일명 ‘더러운 폭탄’ 제조에 필요한 핵물질을 획득하기 위해서 혈안이 된 알 카에다가 핵연료 운반선을 공격 목표로 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잡종 해적도 등장했다. 스리랑카 해역을 주름잡고 있는 악명 높은 ‘바다 호랑이’ 해적은 이데올로기 해적이면서 밀렵꾼 해적 노릇도 한다. 테러 조직인 ‘타밀 일라마 해방 호랑이’는 1990년대 초 ‘바다 호랑이’라는 해적 단체를 조직했고, 2000년대에 이미 두 번이나 끔찍한 테러 작품을 모조해서 악명을 떨쳤다. 지금까지 ‘이리쉬 모나’ ‘프린세스 웨이브’ ‘아피나’ 등 무수한 선박들이 ‘바다 호랑이’의 먹이가 되었다.
무방비 상태인 공해(公海)와 항만의 경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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