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전도 못건진 ‘타이완 독립’
  • 베이징·주장환 통신원 (jjhlmc@sisapress.com)
  • 승인 2002.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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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이볜 ‘한 지역 한 국가론’ 발언에 중국측 강공…장쩌민 세력 강화만 도와


조용하게 올 가을 열릴 제 16차 공산당 전당대회를 준비하던 중국이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아직까지 유일하게 중국으로 ‘되돌아오지 않은’ 땅 타이완(臺灣) 총통 천수이볜(陳水扁)의 발언 때문이다. 그는 지난 8월3일 재일 타이완 단체인 세계타이완동향회연합이 도쿄에서 개최한 29차 연차 총회 개막식에 화상으로 축사를 보내, 타이완과 맞은편의 중국은 각 지역이 하나의 국가라는 ‘한 지역 한 국가론(一邊一國家論)’과, 필요할 때 국민 투표를 통해 타이완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독립 찬반 국민투표론’을 제기했다. 그동안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라는 원칙을 세우고 ‘한 국가 두 체제(一國兩制)’ 방안으로 통일을 추진하던 중국은 즉각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다.


<런민르바오(人民日報)>는 8월5일자 사설에서 ‘천수이볜은 2천3백만 타이완 인민들을 타이완 독립이라는 화약통에 묶어 놓았다’고 비난했다. 또 8일자 <환츄스바오(環球時報)>는 ‘타이완이 독립 찬반 투표를 실시한다면 이는 바로 중국에 대한 선전포고이다’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런민르바오>는 특히 현재 정기 군사 훈련 중인 군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무력 응징 가능성도 시사했다.


타이완 증시는 일시적으로 폭락했고, 천수이볜은 이미 예정된 타이완 동부 해안에서의 대 잠수함 훈련을 중국의 군사 행동을 촉발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또 자신의 ‘한 지역 한 국가론’의 본뜻은 중국과 타이완 각각의 주권이 대등하다는 ‘주권대등론’이라고 한 발짝 물러났다. 지난 대선에서 정권 창출에 실패해 야당이 된 타이완 국민당은 천 총통 발언에 대해 “국민의 관심을 대외로 돌리기 위한 전술이고, 타이완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한 처사이다”라고 비난하고, 차량 수 백대를 이용해 ‘타이완 독립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


미국 역시 천 총통의 발언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 8월6일 천 총통의 발언은 정치적이나 경제적으로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논평했다. 또 미국 국가안보위원회 대변인도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변함이 없다”라고 못박았다.


이렇듯 언뜻 보면 실속 없는 발언을 천 총통은 왜 했을까. 타이완 내부 사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중국인’이기보다 ‘타이완 인’이 되기를 열망하는 국민의 지지를 업고 총통에 당선된 천수이볜은 이 문제에서 일정한 성과를 이루어야만 한다. 천 총통이 소속된 민진당은 타이완을 중국과 무관한 국가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 정당이다. 국호를 ‘타이완 공화국’, 영토를 ‘타이완과 그 주변 섬들’로 규정하려고 한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그는 그동안 수 차례 중국에 조건 없는 평화회담을 제안했다. 물론 그때마다 중국 당국은 ‘타이완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원칙에 동의해야만 회담을 가질 수 있다는 입장을 되풀이해 왔다. 정치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민진당으로서는 집권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조바심이 생겼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더군다나 중국은 2008년 올림픽을 개최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등 국제 사회에 적극 진입해 돌출 행동을 하기 힘들어졌다.


이런 형세를 간파한 천 총통은 실제로 지난 7월 민진당 전국당원대표대회에서 당 주석으로 선출되자 중국이 계속적인 교섭 제의에 응하지 않으면 타이완은 미래를 향한 독자적인 행보를 취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칭화(淸華)대학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옌쉐퉁(閻學通) 교수는 “이는 지금까지 천수이볜의 발언 중 가장 강경한 것이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타이완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조처를 취할 수도 있다는 위협성 발언이었다”라면서, 따라서 이번 ‘한 지역 한 국가론’은 이미 예상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베이징에서 사업을 하는 왕 아무개씨는 “최근 중국 인민해방군이 타이완 부근에서 군사 훈련을 마치고도 돌아가지 않자, 타이완 인들은 어떻게 된 일이냐며 불안해 했고, 관공서에 문의가 빗발쳤다.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타이완이 제대로 발전하는 길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이번 사태 이후에도 타이완의 한 언론기관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65% 정도가 타이완 독립 투표에 대해 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론조사 결과 “천 총통은 중국인의 공적”


주목할 것은, 이번 사태로 인해 장쩌민(江澤民) 현 국가 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의 입지가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한 소식통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장 주석의 군부 통제 노력이 실효를 거두고 있는 상황에서 천수이볜의 발언은 양안 간의 긴장감을 고조시켜 군부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전체 차세대 인사 논의에서 장 주석은 국가 주석·공산당 총서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 최소한 군사위원회 주석 직은 유지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다고 당 내부 인사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실제로 이번 사태 이후 중국 언론들은 ‘무력 사용을 통해 평화를 확보해야 한다’ ‘우리가 평화를 얻으려면 군사 행동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는 군부 고위 소식통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긴장이 격화하면서 군부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증거이다.


또 권력 재편기여서 누구도 쉽게 입장 표명을 하지 못하는 조심스런 상황에서 군부는 지난 7월1일 인민해방군 창군 75주년을 기점으로 장 주석에 대한 충성을 공공연히 표시했다. 주로 장 주석의 군 현대화 업적을 크게 부각하면서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이는 그동안 진행된 장 주석의 군부 장악 계획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실제로 장 주석은 지난 6월 인민해방군 고위 장성 7명을 상장(上將·대장)으로 진급시키고, 5대 군구 사령관을 모두 측근으로 채워 현존하는 중국 지도자들 중에서 군부에 대한 개인적인 장악력이 가장 높아졌다.


따라서 현재 오리무중인 차세대 지도자 인선에 대해서도 군부가 장 주석의 의중을 파악하고 재빨리 움직이고 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즉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먼저 70세가 넘는 인사들의 은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장 주석이 직접 승진시킨 군부 3세대들로 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다른 부문 인사에서도 70세 이상은 은퇴가 불가피해진다. 한편으로는 계속적으로 군부가 장 주석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군사위원회 주석직 유임설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천 총통의 발언 이후 중국사회조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중 91%가 천 총통을 전세계 중국인의 공적이라고 꼽았다. 그러나 중국인이기를 거부하고 타이완 인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을 대변한 천 총통의 정치적 결단은 오히려 중국 군부의 위상을 높여, 타이완을 통일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보이는 장 주석의 세력 강화를 돕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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