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냐 평화냐 주사위는 던져졌다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cspyon@sisapress.com)
  • 승인 2002.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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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무기사찰 재개…미 국의 요구 많아 마찰 불 보듯
짧게는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지난해 9월까지, 길게는 페르시아 만 전쟁이 발발했던 1990년대 초반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이라크 문제가 마침내 중대 갈림길에 접어들었다. 유엔 결의에 따라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국제 사찰이 재개된 것이다. 전쟁과 평화를 가름할 최후의 길목이 될 무기 사찰 과정에서 최대 쟁점이 무엇인지 알아 보았다. 아울러 때마침 개봉된 기록 영화 〈흐르는 모래 위에서〉를 통해, 1990년대에 있었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사찰이 왜 실패했는지를 조명했다.



올해 벽두부터 최대의 국제 현안으로 떠올랐던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사찰 문제가 일단 미국의 소원대로 풀렸다. 11월18일 마침내 유엔 감시검증사찰위원회(UNMVOC·무기사찰단) 한스 블릭스 단장이 이끄는 선발대 30여 명이 유엔 결의에 따라 이라크에 입국한 것이다.
무기사찰단은 늦어도 내년 2월 하순까지는 사찰 보고서를 유엔 안보리에 제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 11월18일 이라크로 향한 선발대에 이어 11월25일부터 무기 사찰관 수십 명이 본격적으로 현장 사찰에 들어간다. 연말까지는 추가로 85∼100명이 투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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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SCOM
무기사찰단이 일단 정해놓은 사찰 대상지는 천 군데가 넘는다. 사진은 과거 사찰단의 샘플 채취 장면.



‘후세인 궁전’ 등 100여 곳 집중 조사


무기사찰단은 오래 전부터 천 군데가 넘는 사찰 대상지를 정해놓고 그 가운데 앞으로 2개월간 집중 조사를 벌일 목록을 만들었다. 집중 조사 대상은 100여 곳을 헤아린다. 미국은 이번 사찰에 포함된 대다수 시설이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 때 상당 부분 파괴되었지만, 1998년 무기사찰단이 철수한 뒤 이라크 정부가 재건해 왔다고 믿는다.


본격적인 사찰에 돌입할 경우 무기사찰단이 가장 먼저 점검할 대상은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전용하는 궁전 여덟 군데이다. 다른 사찰 대상과 달리 이곳은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 이후로도 사실상 ‘성역’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여덟 궁전 가운데 세 곳은 수도 바그다드에 몰려 있고 나머지는 후세인의 고향인 티크릿을 비롯해 모술·자발 마쿨·타타르 호수·알 바스라 등 이라크 전역에 흩어져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여덟 궁전 안에 건물이 천여 동 들어서 있으며, 가장 큰 궁전의 넓이는 약 4만 에이커로 미국 수도인 워싱턴의 크기와 맞먹는다. 무기사찰단은 여덟 곳 모두를 사찰 대상으로 하되, 가장 의심이 가는 한두 곳을 선정해 불시에 사찰한다는 계획이다. 1998년 무기사찰단은 대량살상무기 은닉처로 의심받는 일부 궁전을 미리 통보하고 방문했다가 이라크 당국이 먼저 손을 쓰는 바람에 허탕을 친 경험이 있다.


대통령 궁전 다음으로 무기사찰단이 벼르고 있는 곳은 생물 화학 무기와 미사일, 그리고 핵무기 개발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들이다. 특히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사방에 산재한 10여 군데 시설이 사찰 대상이다.


미사일 개발과 관련해 무기사찰단의 관심을 특히 집중시키는 곳은 바그다드 서쪽 60km 지점에 있는 알 라파의 공장 시설이다. 미국 정보 당국은 이라크가 바로 이곳에서 사정거리 145km가 넘는 탄도 미사일을 실험하고 개발한 것으로 믿고 있다. 또 바그다드 북쪽 알 무스타심에 있는 한 고체 로켓 실험 시설도 사정거리 700∼1000km인 중장거리 탄도 미사일에 장착할 핵심 엔진을 생산하는 곳으로 의심받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이라크가 사정거리 480km가 넘는 스커드 미사일 12~24개를 개발해 숨겨 놓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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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mma
유엔 안보리가 미국의 입장이 관철된 무기사찰단 파견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무기사찰단은 이라크가 1990년대 중반까지도 생물 화학 무기를 숨겨 놓고 있다가 발각된 ‘전과’를 감안해, 이번에도 이 부분을 집중 사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곳은 바그다드 서부에 있는 팔루자 화학회사 두 곳, 북쪽에 위치한 이븐 시나 화학회사, 아미리야 세룸 백신회사, 동쪽에 있는 알 다라 백신회사이다. 특히 페르시아 만 전쟁 때 생물 화학 작용제가 발견된 곳인 아미리야 세룸 백신회사가 사찰 장소이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이라크 당국이 이 회사 비밀 창고에 지금도 대량의 VX·사린·겨자 가스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생물 화학 작용제를 비축해 놓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생물 화학 무기나 미사일과 달리 이라크 내 핵 관련 시설에 대한 사찰은 무기사찰단이 아닌 국제원자력기구(IAEA) 몫이다. 미국 정보 당국은 이라크가 최소한 박사급 이상 핵공학자 2백명을 확보해 핵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아직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 핵 사찰팀은 특히 바그다드에서 18km 남쪽에 있는 투와이타 핵연구센터를 주목한다. 페르시아 만 전쟁 이후 이곳의 핵 연료는 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 아래 모두 제거되었지만, 근래 들어 이곳의 핵 시설들이 활발하게 재건되고 있음이 지난 9월 미국 첩보 위성에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1981년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핵무장 기도를 막겠다며 기습 공격을 감행한 오시라크 원자로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미국 정보 당국은 대량살상무기와는 별 관련이 없거나 경계 짓기가 모호한 영역에까지 사찰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를테면 무기사찰단이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이라크의 지하 벙커도 사찰하려고 한다. 또 이라크가 개발한 것으로 보이는 무인용 비행기구도 사찰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기구가 생물 화학 작용제를 실어 나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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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방해’ 범주 모호해 분란 가능성


이처럼 무기사찰단은 볼 수 있는 것은 다 보아 달라는 요청을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지만, 이는 또 다른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무기사찰단이 가진 관련 정보가 실은 ‘물질적 확증’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이라크를 탈출한 인사의 말, 전 무기사찰단원의 증언, 그리고 미국 정보 당국이 제공한 제한적인 정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방적인 태도도 문제다. 미국은 이라크가 사찰 활동을 방해할 경우 이를 ‘중대 위반’으로 간주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여러 차례 위협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정작 ‘방해 행위’의 범주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범주의 모호함은 과거 사례에서도 입증된다. 1998년 무기사찰단이 실시한 사찰 횟수는 4백23건인데 이 중 ‘사찰 방해’ 행위로 지목한 것은 모두 5건이었다. 그 중에는 무기사찰단의 접근이 45분 지연된 것, 바그다드 대학의 과학과 학생 전원을 인터뷰하겠다는 요청을 이라크측이 거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또 무기사찰단이 이라크가 성스러운 날로 여기는 날짜에 사찰하겠다고 ‘횡포’를 부리다가 거부당한 것도 방해 행위 사례에 들어가 있다.


오는 12월8일 이라크가 제출할 대량살상무기 시설 신고 목록과 관련해서도 마찰 요인은 상존한다. 통상 화학 시설은 평화시 민수용 품목을 생산하다가도 전시에는 언제든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이중 용도’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발효 공장은 평상시 맥주도 만들 수 있지만 전시에는 생물 무기를 생산할 수 있다. 벌레 퇴치용으로 쓰이는 농약 분무기 공장도 언제든지 독가스 물질을 주력 생산품으로 바꿀 수 있다. 이라크의 경우 현재 생물 화학 무기 개발을 의심받고 있는 대다수 화학 시설이 바로 이런 ‘이중 용도’ 시설이다.


이전에도 이같은 이중 용도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무기사찰단의 진실 규명 작업만큼 엄청난 위력을 가진 예는 별로 없었다. 결과에 따라 ‘전쟁이냐, 평화냐’ ‘사느냐, 죽느냐’가 갈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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