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북한 핵 파동 10년 전 궤적 다시 밟나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2.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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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북 주도권 약해질 때 불거져…한국 정권교체기 등 상황도 비슷
역사는 돌고 돈다. 최소한 한반도 상공을 다시 어둡게 짓누르는 북핵 파문을 볼 때 그렇다. 지난 11월14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북한에 대한 12월분 중유 공급을 중단했다. 이제 12월이 코앞에 닥쳤으니 북한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았다. 북한이 강경 대응할 경우 12월 대선에서 또다시 핵 북풍이 불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1992년 1차 북한 핵 파문 직후 치러진 대선 때는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쳤다.




1992년 10월 한국과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선언했다. 그리고 그 달에 간첩 이선실 사건이 터졌다. 이로써 그 해 8월까지 여덟 차례나 진행된 남북 고위급회담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때맞추어 불어닥친 북풍을 등에 업고 김영삼 후보가 당선했다.


당시 북풍의 출발점이 된 것이 바로 북한 핵이었다. 미국이 영변 핵시설 증거라며 인공 위성 사진을 들이대고 남북경협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을 때 정부 내에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노태우 정부의 주류는 병행론자들이었다. 이들의 생각은 핵문제는 핵문제대로 풀되 남북 대화는 대화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YS, 북풍 업고 당선


그러나 대통령 선거가 본격화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민자당 김영삼 후보 캠프를 중심으로 연계론자들이 힘을 얻은 것이다. 연계론이란 북한이 핵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경협 등 모든 교류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영삼 후보 캠프는 승리하기 위해 북풍을 활용했고, 결과적으로는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그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즉 연계 전략을 쓴 탓에 모든 대북 협상 주도권을 미국에 헌납하고 비용은 비용대로 우리가 지출하는 난처한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기간에 남북 관계 역시 최악이었다.


그런데 지난 10월 제2차 북한 핵 파문 이후 똑같은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미국의 움직임이 그 때와 거의 비슷하고, 더구나 한국은 정권 교체기이다.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그동안 잠복했던 연계론자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자칫하면 차기 정부가 김영삼 정부와 같은 시행 착오를 되풀이할 수 있는 국면이다.


우선 시대 상황을 비교해 보자. 1990년대 초는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져 북한이 대외 관계에서 대전환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북한은 당시 남북 관계와 북·일 관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했다. 1990년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를 중심으로 한 자민·사회 양당 대표단이 방북한 것을 계기로 북한은 일본과 공동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북·일 관계 50년사의 대사건이었고, 동북아 냉전의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신호탄이었다. 남북 관계에서도 기본 합의서가 체결되는 등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동북아에 갑자기 해빙이 찾아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북아에서 미국은 북한이라는 핑계거리가 있어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이 문호를 개방하면 결국 미국의 존재 의미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제1차 북한 핵 파문은 동북아에서 부는 해빙 바람을 잠재워 북한을 구석에 묶어두고 미국의 영향력을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지난 10월 초 켈리 특사 방북 전까지 한반도에는 1990년대 초와 매우 비슷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외교의 최고 목표로 삼아왔던 북한이 지난해 10월께 방향 전환을 하기 시작했다. 즉 중국·러시아·유럽연합과의 관계를 외교의 중심 축에 두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덧붙여 북한은 올해 초부터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동북아에서 북한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제 관계 형성이 대세로 자리 잡기 시작하자 일본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9월17일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북·일 정상 간에 ‘평양 선언’이 발표된 것이다. 1990년 가네마루 신 부총재가 주도한 ‘3당 공동선언’에 버금가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으로서는 또다시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7월의 경제 관리 개선 조처에 이어 신의주 경제특구 발표 등을 통해 이러한 질서 변화를 더욱 가속화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확실한 핵 정보 없는 것이 1차 때와 다른 점


이 기간에 또 한 가지 주목할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지난 8월7일 신포 경수로 공사 현장에서 콘크리트 타설식이 치러진 것이다. 2000년 2월부터 본공사를 시작한 경수로 사업은 이 날의 타설식을 통해 비로소 원자로가 들어설 건물 공사에 본격 착수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공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제네바 합의에 의해 뒷받침되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체제, 그리고 경수로 공사는 바로 미국이 한반도 및 동북아 관계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통로였다. 따라서 경수로 공사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조만간 미국이 개입할 명분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결국 새로운 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일부 전문가들에 따르면, 부시 정권 초기에 경수로를 화력 발전소로 대체하자는 주장 등이 바로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이런 주장은 한국과 일본의 반대로 벽에 부딪혔다.


제네바 합의에 불만을 품고 있기는 북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제2차 북한 핵 파문의 시발점이 된 켈리 특사와 강석주 부상의 대화에서 북한은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핵개발 의혹을 추궁하는 켈리에게 강석주는 “우리는 더한 것도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은 이를 북한이 핵개발을 시인한 것이라고 기정사실화했고, 북한은 미국이 과장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한 정부 고위 당국자의 발언이 시사적이다. “분명 미국이 과장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북한도 켈리 특사의 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북한은 왜 켈리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을까. 다시 경수로 문제로 돌아가 보자. 경수로 공사의 상당 부분이 완료되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해 전면적인 핵사찰이 시작되고, 핵심 부품 인도 절차가 시작된다. 부품 인도에 앞서 미국과 북한 간에 원자력협정이 체결되어야 하는데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북·미 정부 간에 협정을 맺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미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 기간이 부지하세월이라는 것이다. 과거 미·중 간에 원자력협정이 체결되는 데 13년이 걸렸다는 얘기도 있다. 결국 제네바 합의의 구조로는 북한이 경수로를 제대로 공급받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북·미 양측은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고 공감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이나 일본을 따라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충격 요법이 동원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 1차 북한 핵 파문 당시와 최근의 2차 북한 핵 파문의 결정적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차 북한 핵 파문 당시에는 한국 정부도 미국이 제공하는 정보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이 현지에서 의문을 제기했고, 미국측이 의심 나는 시설에 대한 위성 사진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켈리가 북한에 가서 말싸움을 하고 온 것 외에는 정보라고 얘기할 만한 것을 미국측이 내놓은 적이 없다. 그만큼 미국이 다급하게 움직였다는 증거다.


미국, 주도권 쥐고 북·미 협상 나설 듯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우라늄 원심분리기를 사들였을 가능성이 미국 언론에 의해 제기되었고 켈리가 그 영수증을 강석주에게 흔들었다는 풍문도 있으나 모두 첩보 수준의 얘기에 불과하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미국도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다만 우려한다는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군 정보 계통의 고위 당국자 역시 군의 분위기가 1차 때와는 사뭇 다르다고 얘기했다. 지금은 미국의 의도를 의심하는 시각이 군 내부에도 상당히 퍼져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번 2차 파문 때도 미국이 들고 나온 핵 카드는 위력을 발휘했다. 한국과 일본을 제치고 다시 미국이 한반도 정세의 중심 무대에 복귀한 것이다. 한 대북 전문가는 과거 1차 때의 경험을 참고로 한다면 미국이 앞으로 구사할 전략은 다음과 같은 순서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선 첫 번째로 무력화이다. 즉 기존 남북 관계나 북·일 관계를 차단하고 미국이 대북 협상권을 독점하는 단계이다. 과거 1차 때에 등장했던 이 수법은 최근에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출되고 있다. 다만 1차 때와 다른 점은 북한이 협상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한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핵 파문에도 불구하고 최근 북한이 금강산 특구 및 개성공단에 대해 전향적 조처들을 계속 내놓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두 번째 단계는 북·미 회담 국면이다. 한국이나 일본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고 미국 내 정치 일정 등을 감안해 가며 북·미 협상을 시작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 경우 제네바 합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합의를 구상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다시 한국과 일본을 끌어들여 비용을 분담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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