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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줄타기 외교’도 대물림

싱가포르 리콴유·리셴룽 부자, 중국·타이완 상대로 절묘한 실리 외교

박성준 기자 ㅣ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08.31(Tue)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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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독립 문제를 놓고 중국과 미국이 삼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면, 똑같은 문제로 중국과 타이완의 틈바구니에서 또 하나의 작은 삼각 관계를 이루며 줄타기 외교를 하는 나라가 있다. 한때 중국 개혁·개방의 교사 노릇을 했고, 타이완과도 정식 외교 관계는 없지만 오랜 교류를 자랑해온 동남아의 ‘강소국’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인구 4백30만명에, 국토 면적이 682.7㎢에 불과하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은 2003년 기준 2만3천7백 달러로 세계 최상위 수준이다. 싱가포르가 번영을 구가하는 첫째 이유는 인종·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기업 활동에 종사할 수 있게끔 문호를 활짝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해 국력을 국가 발전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유난한 중앙 집권 체제는 국제 사회에서 때로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받아 왔지만, 미국의 전 국무장관 핸리 키신저는 오히려 ‘싱가포르 모델이야말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든 독특한 전형’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대외 관계에서 철저하게 실리를 파고드는 실용 외교 노선도 싱가포르를 번영케 한 큰 동력이다.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이자 싱가포르의 오늘을 있게 한 리콴유 전 총리는 미국의 닉슨·레이건 대통령과 친했고, 중국의 덩샤오핑과 가까웠으며, 타이완의 장징궈·리덩후이 등 역대 총통과도 교분을 쌓았다.

싱가포르의 실용 외교는 1960년대 이래 약 30년간 싱가포르를 이끈 리콴유 총리 시대와 1990년대의 고촉동 총리 시대를 거쳐 최근 리셴룽 총리 시대로 전수되었다. 리콴유 전 총리의 아들인 리 총리는 고촉동 총리 밑에서 싱가포르 중앙은행장·부총리 등 요직을 역임하며 후계자 수업을 쌓았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과 미국 하버드 대학을 나온 리셴룽은 지난 5월 싱가포르의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에 의해 차기 총리로 지명되었으며, 지난 8월12일 마침내 싱가포르의 제3대 총리로 취임했다.
리콴유·리셴룽 부자는 리셴룽의 총리 취임을 전후해 중국과 타이완을 상대로 또 한번 절묘한 줄타기 외교를 성공시켰다. 지난 7월 초, 총리 취임식을 앞두고 리셴룽 당시 부총리가 타이완을 전격 방문한 것이 발단이었다.

7월10일 리셴룽 당시 부총리는 중국 당국의 사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비공식·개인 신분’으로 타이완 방문을 단행했다. 지난 3월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천수이볜 총통이 재선에 성공한 이후 ‘양안 관계’가 악화일로이던 시기였다. 당연히 중국은 발끈했다. 중국 당국은 리 부총리의 타이완 방문은 ‘어떤 구실로도 설명될 수 없으며, 중국의 국익은 물론 중국·싱가포르 양국 관계에도 절대적으로 손해를 끼친 행위’라며 격렬하게 공격하는 한편, 중국측 고위 인사의 싱가포르 방문 계획을 줄줄이 취소했다.

리 부총리가 중국측의 거센 반발을 뻔히 예상했으면서도 타이완행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 주간지 <야조조칸>은 리 부총리의 타이완 방문 목적 가운데에는 싱가포르군을 훈련하기 위해 타이완측으로부터 기지 및 관련 시설을 지속적으로 제공받는 합의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도했다. 국토가 협소한 싱가포르는 일찍부터 싱가포르 정예군을 훈련할 수 있는 해외 훈련 기지를 물색해 왔다. 싱가포르는 이미 타이완과 ‘성광 계획(星光 計劃)’이라는 군사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육군으로부터 시작한 군사 교류가 해군과 공군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측은 리셴룽 총리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진화 작업’에 나섰다. 때마침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이었다. 아버지가 선수를 치고 나섰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한 국제 포럼에서 덩샤오핑 최대의 오점으로 지적되는 1989년 ‘6·4 톈안먼 사태’를 언급하며 ‘만약 내가 덩샤오핑이었다면, 나 역시 중국의 100년 대계를 위해 당시 학생 시위를 강제 진압했을 것’이라며 덩샤오핑 찬양에 나선 것이다.

8월22일에는 아들이 나섰다. 이번에는 ‘개인 자격’이 아니라 싱가포르 정부의 수반이라는 공식 자격으로, 타이완의 독립 움직임을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공식 연설을 통해 먼저 ‘중국과 갈등을 빚은 타이완 방문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사과 표시를 한 다음, 곧바로 타이완에 대한 경고에 나섰다.

그는 ‘타이완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 움직임에 대해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으며, 만약 중국과 타이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결코 타이완 편을 들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또 ‘타이완이 독립을 향해 나아가더라도 결코 타이완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 아시아의 다른 나라도 우리와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라며, 중국의 국시인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8월25일 중국은 리 총리의 사과를 일단 받아들였다. 중국 외교부 궁취안 대변인은 ‘싱가포르의 새 지도자가 싱가포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고 타이완 독립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거듭 밝힌 사실을 주목한다’고 밝혔다. 이 사실은 즉각 싱가포르의 최대 일간지 스트레이츠 타임스의 1면을 장식했다. 싱가포르는 중국측의 신뢰도 잃지 않고, 타이완으로부터 군사 훈련 장소를 제공받는 외교 행위를 깔끔하게 마무리한 것이다.
싱가포르가 중국과 타이완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특수하다. 싱가포르의 인구는 중국 출신 화교 76.7%, 말레이인 14%, 인도인 7.9%, 기타 1.4%로 구성되어 있다. 싱가포르는 중국인과 한 핏줄인 화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인의 나라이며, 주변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이슬람권 국가로 둘러싸여 있다. 리콴유의 노력으로 싱가포르는 일단 주변국과 원만한 관계를 이룩했지만, 결국 ‘믿을 데’라고는 중국과 타이완밖에 없다.

싱가포르에 중국과의 안정적인 관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명성만으로 따지면 덩샤오핑도 부럽지 않은 인물이지만 리콴유 전 총리는 올해 6월 정계를 공식 은퇴한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을 방문해 중국 최고 지도자에게 허리를 굽혀 왔다.

싱가포르는 최근 부쩍 늘고 있는 중국 본토 출신 여행객을 잡기 위해 ‘쇼핑 천국’ 홍콩과 한판 뜨거운 라이벌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 6월 중국 방문 때에도 리콴유 전 총리는 중국 관광객이 싱가포르를 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비자 발급 절차를 간소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러고 나서 리셴룽 신임 총리가 타이완을 찾아간 것이다.

중국과 타이완을 사이에 둔 싱가포르의 실용 외교 정책은 비슷한 처지인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외교는 ‘호·불호’가 아닌 ‘실사구시’여야 한다는 사실을 벤치마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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