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를 게이의 거리로 선포한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3.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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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퀴어 문화축제/5백여명 퍼레이드 펼치며 ‘동성애 차별 금지’ 외쳐
“살아 있다면?” “움직여!” “행복하고 싶다면?” “움직여!” 지난 6월21일 오후,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은 동성애자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이하는 퀴어 문화축제의 중심 행사인 ‘퀴어 퍼레이드’가 시작된 것이다. 동성애자를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 <해피 투게더>의 주제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참가자 5백여명은 성적 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며 ‘동성애자 차별 금지’를 목청껏 외쳤다.

데미지(예명·34)라는 동성애자는 4년째 똑같은 구호가 적힌 푯말을 들고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그의 구호는 바로 ‘나는 조선의 호모다’라는 것. ‘나는 조선의 국모다’를 패러디한 이 불온한(?) 구호를 들고 그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과 2백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성적 취향의 자유’를 외쳤다.

탑골공원에서 출발한 퍼레이드 행렬은 종로2가 삼성타워를 거쳐 인사동 어귀에서 끝났다. 퍼레이드 후에는 본격적인 축하 무대가 꾸며졌다. 2시간 여에 걸쳐 진행된 축하 무대의 하이라이트는 동성애자의 거리 선포식이었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단상에 오른 김현구 집행위원은 “많은 동성애자들이 종로를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종로는 한번도 동성애자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그러나 종로는 어제도 동성애자의 거리였고, 오늘도 동성애자의 거리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동성애자의 거리로 남을 것이다. 종로를 동성애자의 거리로 선포한다”라고 외쳤다.

대한민국 1번가 종로가 동성애자의 거리라니, 동성애자들은 왜 이런 도발적인 구호를 외친 것일까? 이 구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로 3가 낙원동 일대의 어제와 오늘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현재 낙원동 일대에는 동성애자 전용 업소가 61개나 밀집해 있다. 처음 들어설 때만 해도 전부 통기타 클럽이었던 것이 노래방 문화의 영향으로 대부분 가라오케로 바뀌었다. 이밖에 동성애자 전용 칵테일바·소주방·커피숍은 물론 전용 포장마차까지 들어서 있다. 게이 바가 많아지고 동성애자들이 지역 상권의 중심으로 올라서면서 동성애자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낙원동에 거주하는 한 동성애자는 “낙원상가 지하 슈퍼의 밤 손님은 거의 동성애자이다. 동성애자가 빠져나가면 이곳은 다시 슬럼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낙원동에서 시발한 게이 바 문화는 20년 세월을 거치면서 서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90년대 초반에는 이태원에 동성애자 전용 클럽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1996년에 공덕동에 생긴 ‘레스보스’를 시작으로 신촌에는 레스비언 바가 여기저기 생겨났다. 요즘은 홍대앞·녹번동·화양리·방이동·가리봉동 등 서울 곳곳에 게이 바 문화가 퍼져 있다.

‘얼린 물수건을 주는 가게’로 통하는 게이 바는 386 동성애자들이 주로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음울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에서 밝고 세련된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게이 바 ‘겐조’를 운영하고 있는 구민호씨(가명·44)는 “손바닥만한 간판을 내걸고 지하에 숨어서 영업하던 옛날과 달리 요즘 게이 바는 간판도 큼직큼직하게 달고 1층에서 문 열어놓고 영업한다. 의사·변호사 같은 전문직 동성애자들도 찾을 만큼 문화가 바뀌었다”라고 말했다. 동성애 문화는 386세대를 중심으로 그 이전 세대와 확연하게 나뉜다. 윗세대 동성애자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고 이중 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부분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정 생활을 하다가 주말이면 몰래 게이 바를 찾아 동성 파트너를 만나는 것이 일반적인 유형이었다. 이런 기혼 게이들의 경우 동성애자 인권운동보다 자신의 이중 생활을 유지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동성애자에게 우호적으로 바뀌면서 386 동성애자들의 관심은 이제 인권 문제에서 생활 문제로 옮겨졌다. 겐조에서 만난 천정남씨(34)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동성애자도 누리고 싶다. 연말 정산에서 배우자 소득공제를 할 때나 연금이나 생명보험 수혜자 순위를 정할 때 동성 파트너를 배우자로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386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자 사회 내부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요즘 동성애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동성애자들의 매매춘이다. 현재 낙원동 일대에는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 호스트 바가 10여 곳 들어서 있다. 문제는 이런 호스트 바에서 이성애자인 대학생들이 일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성을 파는 것은 물론 성 정체성을 팔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자 사회 내부의 성폭력 문제도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해코지’라고 불리는 동성애자 사이의 성폭력은 동성애자가 아직 성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상대를 대상으로 무리하게 성적인 접촉을 해서 정신적인 상처를 주는 것을 일컫는다. 한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 관계자는 “해코지가 권력관계에서 작동하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했다면 성폭력으로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요즘 386 동성애자들이 가장 걱정하고 있는 점은 동성애자들의 문제 의식이 약해졌다는 점이다. 동성애 운동이 움츠러들면서 ‘젊은 피’가 원활하게 수혈되지 않아 ‘친구 사이’의 평균 연령도 33세나 된다. 퀴어 문화축제를 준비한 동성애자도 대부분 30대였다. 친구사이 운영위원인 박철민씨(35)는 “요즘 대학생 동성애자들은 즐기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만큼 동성애자들이 살기 편해진 세상이 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아직 산적한 문제가 많은데 안주하는 것 같아 아쉽다”라고 말했다.

동성애 퍼레이드는 분산된 동성애자들의 힘을 모으는 데 좋은 행사였다. 40대 트렌스젠더부터 교복을 입은 10대 여학생까지 함께 어울렸다. 외국인 참가자도 많았다. 서울대 대학원에 공부하러 왔다가 학내 동성애자 동아리를 통해 행사 소식을 듣고 참가한 한 미국인은 “이런 행사는 동성애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회에 알리는 데 큰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초여름 어귀에 종로를 수놓았던 무지개 깃발은 내년에 또다시 나부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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